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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실록 117 - 공민왕 1

이찬조 2021. 10. 30. 06:42

고려왕조실록 117 - 공민왕 1

- 새로운 고려를 열어갈 젊은 왕의 등극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외척의 천횡을 막지 못하고 왜적의 침입 등 어지러운 정세를 다루어 나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자, 원나라에서 그를 폐하고 원나라의 위왕의 딸 노국대장 공주와 결혼한 공민왕을 강력하게 후원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때가 1351년 10월로 공민왕의 나이 22세 때입니다.

 

고려 제31대 왕으로 등극한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자 공원왕후 홍씨의 소생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기도 했습니다. 이름은 전(顓)이고, 첫 이름은 기(祺)였으며 몽고 이름은 ‘백안첩목’이었습니다. 1330년 출생하여 강릉대군으로 봉해졌으며 원나라 왕 순제의 입조 요구로 1341년 5월 12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게 됩니다.

 

※ 숙위(宿衛)의 의미: 궁궐을 숙직하여 지킨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중국의 주변 국가들이 자국의 왕자나 귀족자제들을 중국 조정에 보내 조공하고 시류(侍留)하면서 황실의 권위를 높여주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행해진 외교의 한 형태입니다.

 

원나라에서 10여년을 머무르며 숙위한 그는 몽고의 모든 사정에 정통하였는데, 그는 원나라에 머물며 왕에 책봉이 된 탓에 귀국하기 전까지는 대신들을 통하여 고려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제현으로 하여금 정승을 대행케 하여 임시로 국사를 전담하도록 하였고 도전(道殿)과 신사(神社)들을 수축(修築)하고 법관들에게 명하여 각 도의 존무사(백성의 어려움과 관리의 업무상황을 감찰하는 직)와 안렴사(지방의 수령으로 관찰사와 동일한 의미)들의 업적과 죄과를 심사하게 하고, 새로운 인재들로 조정의 관리들을 일신하는 등 귀국 전 원나라에서부터 개혁정치를 위한 기초를 단단히 세웁니다. 

 

그해 12월 노국대장 공주를 대동하고 고려에 돌아온 그는 이전의 왕들과는 달리 1백년 원나라의 복속국으로 원의 사사건건 간섭으로 정통성을 잃고 혼란에 빠져있는 고려사회에 일대 개혁의 칼날을 들이댈 왕이었습니다.

 

12세에 원나라에 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공민왕은 원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주변의 정세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300년대를 넘기면서부터 중국대륙에서는 홍건적이 급격하게 세를 불려 원 내부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민왕은 원나라는 머지않아 쇠퇴하고 명나라가 부상하여 대륙의 강자로 군림하게 될 것이라는, 즉 원명(元眀)교체라는 대륙의 정세를 확연하게 읽어 낼 수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그러한 판단을 하지 못하였다면, 즉위 후에 공민왕이 과감하게 펼쳐낸 배원정책과 갖가지 조치들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기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원나라의 꼭두각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왕의 즉위와 폐위를 원나라에서 주관하였으며 그 밖의 모든 주요한 사안들 역시 원나라의 간섭과 승인을 받지 않고는 해결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즉위와 함께 강력한 개혁조치를 시행한 공민왕은 원나라 주변에서 펼쳐지는 대륙의 정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배원정책과 국권회복의 기치를 높이 세운 임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야 고려는 백여년 만에 그야말로 임금다운 임금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