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7 자초 등극과 여불위 출세-여씨 춘추 발간의 유래

이찬조 2019. 12. 22. 06:38

열국지(熱國誌) (7) 자초 등극과 여불위 출세-여씨 춘추 발간의 유래

      

소양왕이 서거하자,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를 효문왕(孝文王)이라 칭했다.

안국군이 등극함에 따라 자초가 태자로 책립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불위로 보면, 득세(得勢)의 길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트인 셈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등극한 효문왕이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서, 왕위에 오른지 불과 사흘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불과 사흘 사이에 두 명의 왕이 잇달아 서거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자초가 왕위에 오를 차례였다.

그러나 자초는 연달아 발생한 불상사에 가슴이 아파서,

"두 분 선왕께서 연거푸 돌아가신 이 때에, 내 어찌 당장 왕위에 오른단 말이오. 이것은 효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소상(小祥)이나 지난 뒤에 등극하겠소."

하고 엉뚱한 고집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효성이 망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중신들은 허리를 굽혀 절하며, 이렇게만 말할 뿐 아무도 반론을 하지 않았다.

이에 여불위는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천하의 정세가 분분한 이 시기에 보위(寶位)를 어찌 하루인들 비워 둘 수 있으오리까 ? 이것은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하시는 일이기도 하옵니다. 진정으로 효도를 하시려면 마땅히 오늘로 등극하시어 국기(國基)를 더욱 굳건히 하시옵소서. 전하로서의 효도의 길은 오직 그 길이 있을 뿐이옵니다."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여불위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펴는데는 그 나름대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자초처럼 감상에 사로잡혀서 등극을 미루다가는 왕위를 어느 귀신에게 빼앗겨 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나?

더구나 자초에게는 배 다른 형제가 스물두 명이나 있어서, 그들도 저마다 왕위을 은근히 넘겨다보고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이 이에 이른 여불위는 중신들을 노여운 눈초리로 둘러보며 엄포라도 하듯 이렇게 따져들었다.

"나라를 올바르게 인도해 나가야 할 중신들은, 무슨 생각에 침묵을 지키고 계시오. 나랏님의 자리를 오fot동안 비워 두어도 괜찮다는 생각들이오? 그렇지 않으면 태자를 제쳐놓고 다른 왕자를 등극시키려는 생각이라도 하고 계신가요? 만약 그런 생각이 있거든 이 자리에서 숨김없이 털어놓아 보시오."

<동궁 국승>이라는 지위가 제아무리 높아도, 실무(實務)를 하는 중신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불위가 중신들을 부라려 보며 호통을 친다는 것은 직위에 어긋나는 망동이었다.

그러나 중신들은 자초와 여불위 간에 특별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불위의 호통에 모두들 몸을 떨었다. 자초가 등극하는 날이면, 여불위가 모든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에 중신들은 몸을 떨며 입을 모아 말했다.

"동궁 국승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인 줄로 아뢰옵니다. 보위는 하루라도 비워 둘 수 없는 일이오니,

전하께서는 오늘로 즉위하시는 것이 타당하옵니다."

"음 ....,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

이리하여 자초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를 장양왕(莊襄王)으로 칭했다.

장양왕은 즉위식이 끝나자, 만조백관들 앞에서 여불위를 특별히 불러내어 감격어린 어조로 이렇게 분부하였다.

"내가 오늘날 보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경의 덕택이었소. 경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던들

내 어찌 조나라를 탈출할 수가 있었을 것이며, 탈출을 못 했다면 어찌 보위에 오를 수가 있었을 것이오. 내 이미 보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처음의 약속대로 경을 승상(丞相)에 제수하겠소.

 

<승상>이란 지위는 왕의 다음가는 권력의 자리이다. 여불위에게 중책(重責)이 맡겨지리라고 예측을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너무도 파격적인 등용에 중신들은 입을 벌리며 놀랐다.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신 여불위, 천학비재(淺學非才)하오나, 신명을 다해 대왕을 보필하겠사옵니다."

여불위가 바닥에 엎디어 사은숙배(謝恩肅拜)하자, 장양왕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고맙소이다. 경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내 워낙 경륜이 부족한 사람이니, 모든 국사는 승상과 상의하여 처리해 나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중신들을 돌아보면서 말하는데,

"중신들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여 승상은 나의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경륜이 천하에 뛰어난

어른이시오. 그러므로 경들은 여 승상을 나처럼 여기고, 충성스럽게 받들어 모시도록 하시오."

왕이 이정도로 나오니, 제아무리 경륜이 많은 중신이라 하여도 여불위를 감히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양왕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게 여겼는지, 다시 이런 분부를 내렸다.

"아울러 경에게는 <문신후(文信侯)>를 제수하며, 성동(城東)에 있는 50식읍(食邑) 10만 호의 영지(領地)를 별도로 하사하오."

여불위가 장양왕에게 하사 받은 50식읍 10만 호의 영지는, 가히 조그만 나라 하나의 크기였다.

(승상의 자리에다 10만 호, 50식읍의 문신후 ..... ? )

여불위는 꿈을 꾸는 것 같아 자기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보았다.

아프다. 아픈 것을 보면 꿈이 아닌 것이 확실하였다.

권력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어서, 여불위가 승상에 자리에 오르자, 그날부터 그의 집에는 축하객과 아첨배들이 천객만래(千客萬來) 하였다. 그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신들도 있었고, 명성이 자자한 선비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일등재상(一等宰相)의 눈에 띄기 위해, 천하의 재사, 현사들이 앞다투어 여불위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것이었다.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문객(門客)들을 접대하자니, 여불위의 집은 노복(奴僕)만도 3백 명이 넘게 되었다. 게다가 여불위의 시중을 드는 시녀(侍女)만도 백 명이 넘었다.

(영화를 이렇게나 누리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여씨 가문(呂氏家門)을 영원히 빛낼 수 있는 사업을 하나 일으켜 보았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

여불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혜로운 사공자(四公子)>가 떠올랐다.

지혜로운 사공자란 전국 칠웅 시대부터, 여러 나라의 세도 있는 왕족(王族)들이, 천하의 재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다가 빈객(賓客)으로 접대해 오는 풍습이었다. 그들을 통상 식객(食客)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식객 중에는 경륜이 탁월한 정객(政客)도 있었고,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다 기회를 찾던 선비도 있었고, 변설(辯舌)이 능란한 논객(論客)도 있었고, 점술(占術)이 탁월한 술사(術士)도 있었지만, 힘이 남달리 세거나 도적 솜씨가 비상한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서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면,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가 융숭하게 대접을 해왔다.

주인의 대접이 융숭하다 보니, 식객들도 주인을 소중히 받들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주인의 신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라치면, 식객들은 자기의 일처럼 각자의 재주를 짜내어 주인을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주인과 식객과의 인간관계가 동지적(同志的)인 의리(義理)로 결합되어서, 은연중에 무시 못 할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라고 볼 수 있었는데, 울타리치고는 이처럼 믿음직스러운 울타리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도 있는 왕족치고 식객 2,3백 명쯤 거느리지 않은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도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같은 왕족은 식객을 무려 3천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 네 사람을 <지혜로운 사공자>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여불위 자신도 문신후(文信侯)라는 작호를 받았기에, 이제는 자기도 <지혜로운 사공자>를 본받아, 양객(養客)으로 가명(家名)을 높여 보고 싶었다. 승상 여불위가 양객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원근 각지에서 내노라하는 지사(志士), 현사(賢士), 논객(論客), 학자(學者), 술사(術士)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들어,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식객은 무려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가동과 노복들도 천 명으로 늘리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양객을 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한다. 여불위는 워낙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이라, 막대한 돈을 써 가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놀려 두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귀공들은 모두가 학문에 해박한 선비들이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책을 저술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책을 저술하오리까?”

"내가 알기로, 공자(孔子)는 일찍이 <춘추(春秋)>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일이 있었소. 그러므로 귀공들은 춘추 이후의 역사를 편찬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비용은 얼마든지 대 드릴 터이니,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책을 한번 편찬해 보도록 하오. 그래서 그 책이 완성되거든, 책이름을 <여씨 춘추(呂氏春秋)>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말하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여씨 가문의 명성을 길이 빛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여씨 춘추>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식객들의 손에 의해 26권이라는 방대한 부피의 책으로 발간되어,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춘추 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치와 생활의 참고로 삼기위해 저술된, 시대를 볼 수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써, 이것은 오로지 여불위의 혜안(慧眼)과 착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여불위의 문화적 식견이 얼마나 높았는지, 후세에서도 알 수 있게 된 것은 <여씨 춘추>의 저술이었던 것이다.

한편, 식객들에게 위와 같은 부탁을 하고 그들의 뒷일을 보아 주던 와중인 어느 날, 여불위는 장양왕의 부르심을 받고 대궐로 입시하였다.

"대왕 전하! 불러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장양왕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승상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왕이 신하에게 <부탁>이라니 당치 않은 말이지만, 장양왕은 일찍이 조나라에서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에 여불위에게 큰 신세를 진 바 있는지라, 여불위에게 만큼은 왕의 행세를 하기가 거북했던 것이었다.

"무슨 분부이시온지, 하명하시옵소서."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내가 볼모로 잡혀가서 조왕에게 7년 동안이나 가혹하게 박해를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내버려두더라도 조나라만은 기어이 원수를 갚아야 하겠소. 그러니 승상은 나의 심정을 헤아려서, 조나라를 징벌하기로 합시다."

여불위는 장양왕이 조나라에 품고 있는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곧 어명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조를 치기로 하겠습니다."

여불위는 물론 무장(武將)은 아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려면 무엇인가 뚜렷한 공적을 세워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다행히 진나라에는 기라성 같은 명장이 수두룩하였다. 여불위는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주물러 두었으므로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불위가 왕명을 굳건히 받아들일 표정을 보이자, 장양왕이 물었다.

"싸우면, 우리가 승리할 자신은 있겠지요?"

"조나라를 송두리째 멸망시키기는 당장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국경 지대의 성읍(城邑) 몇 개쯤 빼앗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속히 군사를 일으켜, 신금(宸襟)을 평안하게 해 드리겠나이다."

여불위는 퇴궐하는 길로, 몽오(蒙鰲), 장한(章悍), 왕전(王剪) 장군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명했다.

"우리는 어명에 의해 조나라를 치게 되었소. 몽오 장군은 원수(元帥)가 되고, 장한 장군과 왕전 장군은  좌우익(左右翼) 사령관이 되어, 20만 군사를 3대로 나누어 조를 치도록 하시오. 세 장군이 합심하면 승리를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세 사람에게 각각 전축금(前祝金)을 두둑하게 건네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나는 세 장군의 풍부한 지략과 탁월한 전술을 전적으로 신임하오. 그래서 세 장군에게 특별히 중책을 맡기는 바이니, 일치단결하여 기필코 승리하도록 하시오. 이번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세 분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자자손손까지 무한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오."

여불위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엄격할 때에는 추상열일(秋霜烈日) 같다가도, 회유책(懷柔策)을 쓸 때에는 어머니보다도 자애로운 일면이 있었다.

세 장수는 과분한 지우(知遇)에 크게 감동되어,

"승상의 뜻을 받들고, 신명을 다해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굳은 맹세를 뒤로하고 장도에 올랐다.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3대로 나뉘어 조나라를 쳐들어가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壯觀) 이었다. 기마(騎馬)는 산야에 넘치고, 정기(旌旗)는 하늘을 덮어서, 그 위풍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나라는 전국 칠웅 중에서 제(齊), 초(楚)와 함께 비교적 강한 국가이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는 진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진에게 수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진군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의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진군은 이렇다 할 싸움도 안해 보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37개 성을 무혈 점령하고, 조나라의 요충(要衝)인 태원성(太原城)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해 버렸다.

조에서는 태원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도성인 <한단>이 위태로워질 형편이었다.

태원성을 포위하고 10여 일이 경과하자, 이번에는 태원 성주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걸어 나와, 몽오 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왕은 그 비보를 받고, 대책 회의를 긴급히 열었다.

"태원성이 함락되어 이제는 도성이 위태롭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승상 인상여(藺相如)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성루(城壘)를 높이 쌓고 외각으로 돌아가며 늪(池)을 깊게 둘러 파서, 진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적이 도성을 포위하더라도 군량(軍糧) 조달로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니, 우리는 그 사이에 위(魏)와 초(楚)에 사신을 보내어 응원군(應援軍)을 청해야 할 것 이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군사를 총동원하여 늪을 파고 성루를 높이 올려 쌓게 하였다.

진군이 한단성으로 진격 해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군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 조군은 죽은 듯이 성안에만 틀어박힌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승상 인상여가 예상한 대로 진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군량이 몹시 궁핍하였다. 게다가 마침 계절이 겨울이어서 군사들이 동상(凍傷)과 기한(飢寒)으로 연달아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몽오 장군이 그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니, 본국에서는 <37개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흡족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몽오 장군이 "명년 봄에 다시 와서 한단성을 기필코 함락시키고야 말리라!"는 장담을 남기고 돌아오니, 장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선 37개의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나의 원한이 많이 풀렸소. 여 승상과 장군들이 모두 힘을 합해 나의 뜻을 받들어 준 결과이니 고맙기 그지없소!"

이리하여 여불위는 승상으로서 공로를 크게 세웠다. 그는 세 장군을 따로 불러서, 그들의 전공을 극구 치하해 주기를 잊지 않았다. 이런 모양으로 진나라의 국세가 크게 확장해 나가자 여불위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여불위는 사람 장사를 기막히게 잘 하는 재수가 억세게 좋은 사나이였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7) 자초의 등극과 여불위의 출세... (여씨 춘추 발간의 유래)|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