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129:終 - 공양왕3

고려왕조실록 129:終 - 공양왕3 - 정몽주와 공양왕의 죽음 그리고 조선의 개국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이성계에겐 또 하나의 날개, 다섯째 아들 25세의 젊은 피 이방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원은 일반적인 무인의 아들들과는 달리 무과가 아닌 문과 과거에 급제한 문인에 속하면서도, 명분에 발이 묶인 다른 문인들과는 존재의 차원을 달리하는 담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방원은 “필요하면 먼저 행하고, 명분은 그 후에 만드는 것이다”라는 과단성을 갖춘 자로,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이방원의 이런 과단성을 과소평가한 것이 바로 이들 3인이 겪게 되는 엄청난 불행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젊은 피 이방원은 몸져누운 이성계를 개경까지 데리고 와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정도전 등의 참수를 일..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128) 공양왕 2

고려왕조실록(128) 공양왕 2 - 개혁과 역성혁명의 기도 공양왕 재위 3년 동안 신진사대부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의 바람을 불어 넣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고려사회를 다시 건강한 사회로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아니고, 급진적 신진사대부들이 꿈꾸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조치였을 뿐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정몽주로 대표되는 온건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를 위한 개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개혁이라는 화두에 대해서만큼은 공감하고 있었기에 한동안 불안한 동거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들은 관제를 개편하여, 전리사, 판도사, 예의사, 군부사, 전법사, 전공사를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였습니다..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7 - 공양왕 1

고려왕조실록 127 - 공양왕 1 -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등극하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등극하게 된 공양왕 왕요는 정원부원군 왕균의 아들이며 신종의 7세손입니다.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 왕요는 1345년 2월에 태어나 정창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정창군이 되었으며 45세 되던 해에 창왕이 폐위되자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가 곧 고려 제34대 임금인 공양왕입니다. 공양왕 옹립 과정에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집니다. 임금을 제비뽑기로 선택하였으니 말입니다. 창왕 폐위 후 이성계 세력들은 흥국사에 모여서 누구를 왕으로 내세울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됩니다. 이성계가 먼저 의견을 냅니다. “신우와 신창은 원래 왕씨가 아니므로 왕이 될 자격이 없었던 자들이었으므로 종묘와 제사를 받들 수가 없다..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6 - 창왕 2

고려왕조실록 126 - 창왕 2 - 이성계의 부상과 창왕의 죽음 바야흐로 세상의 모든 힘은 이성계에게로 몰리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해 있는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를 든든하게 받쳐주며 세상을 뒤바꿀 원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색은 1389년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꾀합니다. 우선 창왕을 피신시키고 볼 요량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고려에 대한 명나라의 태도는 명나라 왕이 이색에게 내린 교서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려는 중국과의 사이에 산이 막히고 바다가 놓여 있으며 풍속 또한 판이하다. 그리고 중국과 서로 통하였어도 이합이 무상하였다. ..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5 - 창왕 1

고려왕조실록 125 - 창왕 1 - 아버지는 유배 길로 고려 제33대 왕 창왕은 1380년 8월 음축일 우왕과 이림의 딸 근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창왕 역시 역성혁명의 주역들로부터 아버지 우왕과 마찬가지로 본디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고의적인 의혹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나이 9살에 즉위하여 10살에 유배지에서 죽임 당하고만 비운의 왕입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세력에 의해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를 갔을 때 창왕은 나이 9살에 불과한 철부지 아이에 불과 하였습니다. 이성계와 그 측근들은 창왕의 왕위 승계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아비를 유배시키고 장차 죽여야 하는 상황인데 그를 왕위에 올린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이치에 맞지 않..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4 - 우왕 3

고려왕조실록 124 - 우왕 3 - 위화도 회군, 우왕의 죽음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동정벌 구상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때 최영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는 총사령관인 자신이 개경에 남은 채 고려의 모든 군사를 요동 정벌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힌 이성계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설마 쿠데타 까지야 일으키랴 했을까요? 아무튼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예측대로 장마철이 되기도 했지만 북으로 더 이상 진군해 나아가려 하지 않고, 거듭하여 4불가론을 앞세워 회군을 허락해 줄 것을 개경에 요청하였으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진군할 것만을 명합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 거듭된 회군요청과 거부를 명분삼아, 이성계는 참모 장수들을 모아놓고 “이대로 ..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3 - 우왕 2

고려왕조실록 123 - 우왕 2 - 고려는 어느 쪽에 줄을 서야하나? 당시 중국 대륙에는 새로운 왕조 명나라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강성했던 원나라는 명나라에 쫓기어 그 잔존 세력이 몽고지방으로 물러나 북원(北元)을 세운 상태였습니다. 고려 조정의 외교는 혼란스러운 중국대륙의 상황이 말해 주듯이 혼선을 빚고 있었습니다. 배척하던 북원을 다시 중시하면서도 새로이 강자로 부상한 명나라를 무시하지 못하고 이중 외교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나라와 북원의 태도가 고려를 지속적으로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려는 1374년 11월 사신을 명나라로 보내 공민왕의 사망 통지와 공민왕의 시호를 청하고 우왕의 왕위계승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한편 으로는 동년 12월에는 북원에도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상..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2 - 우왕 1

고려왕조실록 122 - 우왕 1 - 아들이 왕이 돠고 그 아들에 죽은 여자 364년 공민왕은 신돈과 함께 득남을 위한 불공을 드리러 가게 되는데 자연스레 신돈의 집에 자주 묵게 됩니다. 그러던 중 신돈의 첩인 기생 반야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고, 중놈이 첩까지 거느리고 ---, 그로부터 1년 후 반야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공민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우왕입니다. 부하의 여자를 자기가 쓱싹한 것이지요. 뭐 하긴 임금은 만백성의 주인이니까 내꺼 내 맘대로 한다는 데야 할 말은 없지만--- 공민왕은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 무척 기뻐합니다. 평소 여색에는 별로였다(노국공주 사망 전에도)고 하는데 부성애만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아들 '우'에게 매번 장난감을 사다주며 아버지로써 사랑을 듬뿍 쏟아 부었다고..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1 - 공민왕 5

고려왕조실록 121 - 공민왕 5 - 신돈의 죽음과 공민왕 시해사건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돈에게 주변의 어떤 모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는 맹세각서를 써서 인감도장으로 날인하고 공증사무소에서 공증까지 마친 보증서를 주면서 개혁의 전권을 신돈에게 부여하였는데, 개혁의 내용이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었기에 그만큼 사대부들의 저항 또한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신돈은 거침없는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로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몇 해 동안 그의 사심 없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통해 고려의 미래는 밝아지는 듯 했으나, 곧 신돈은 과도한 대중적 인기와 권력에 취해 방자해지고 미망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초반에서 소개한 바도 있습니다만, 신돈은 세속 권력에 맛이 들자 가끔 곡..

고려왕조실록 2021.10.30

고려왕조실록 120 - 공민왕 4

고려왕조실록 120 - 공민왕 4 - 김용과 최유의 반란 1361년 10월 홍건적의 평장 반성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다시 고려를 침입해 들어옵니다. 홍건적이 파죽지세로 개경까지 함락해 버리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몽진을 떠나게 되고, 홍건적은 도처에서 불을 지르고 식량을 약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고는 개경의 궁궐을 불 태워 버리는 등 그야말로 10만명의 무리가 온 강토를 초토화 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이듬해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이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총공세를 펴 홍건적을 북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군세 면에서 불리 했던 홍건적은 압록강 건너로 도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홍건적의 괴수 사류와 관선생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니 이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예고하는 ..

고려왕조실록 202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