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17) 연, 위의 멸망
진왕은 형가의 암살 미수사건으로 크게 노하여, 조나라에 주둔 중인 왕전 장군에게 20만 군사를 추가로 보내 주면서 연나라를 쳐서 귀족 양반들을 씨도 없이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왕전이 30만 대군을 휘몰아쳐 연으로 쳐들어가니 연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진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연왕은 성문을 굳게 잠그게 하고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다.
"진군의 기세가 막강하여 우리로서는 대항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중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오늘날 이와 같은 환란을 겪게 된 것은 오로지 태자의 잘못 때문이옵니다. 태자가 암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런 변란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결자해지(結者解之)로 문제를 일으킨 태자의 머리를 진왕에게 베어 바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옵니다."
이와 같이 연나라 중신들은 모두가 정신이 썩어 빠진 위인인지라 국난을 타개해 나가려는 대책조차
너무도 한심할 뿐이었다.
연왕은 한숨을 쉬면서 탄식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하는 일이기로 어찌 태자의 목을 내 손으로 벤 단 말이오?"
중신들이 다시 말한다.
"대왕께서는 아드님이 여러 분 계시옵니다. 그러니 태자의 목숨을 국가의 멸망과 바꿀 수도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사태가 워낙 다급해졌으므로, 연왕은 태자를 불러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중신들은 네가 암살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나라가 무사하려면 네 머리를 베어 진왕에게 바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태자 단우는 울면서 대답한다.
"소자가 진왕의 암살을 시도한 목적은 나라를 보존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소자의 목숨이 필요하다면, 소자는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사옵니다. 그러나 소자의 머리를 베어 바쳐도 진왕은 결코 정벌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중신들은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으니 어떡하냐?"
태자는 땅을 치고 통곡하며 말한다.
"아아, 중신이라는 자들이 이처럼 썩어 빠졌으니 어찌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망할 바에는 소자는 최후까지 적과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소자의 비통한 심정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태자 단우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대궐에서 도망치듯 달려나와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만여 명의 직속 부하들에게 비장한 어조로 말을 했다.
"나라가 망하게 되어서 나는 지금 적과 싸우다 죽으려고 나가는 길이다. 나와 생사를 같이할 사람이 있거든 나를 따라 나서라!"
그러나 태자를 따라 나서는 장졸은 겨우 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태자는 그들만을 데리고, 울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태자 단우가 돌진해 간 곳은 진장 이신(李信)의 진영이었다.
이신은 단우가 공격해 온다는 소리를 듣자, 부리나케 달려나가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신은 40 전의 젊은 용장인지라, 단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신은 불과 10여 합을 싸우다가 마침내 단우의 목을 한 칼에 베어 버림으로써 전투에서의 승기를 잡았다.
한편, 왕전은 이신과 단우가 겨루는 기회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가 연왕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연나라를 단숨에 패망 시키고 말았다.
연나라는 <전국 칠웅>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로 소공석(召公奭)이 주무왕(周武王)에 의해
연왕(燕王)으로 책봉된 이후, 34대 898년 만에 진나라에 의해 허무하게 망해버리고 말았다.
이신은 태자 단우의 머리를 함양으로 가지고 돌아와 진왕에게 승전 결과를 보고하니, 진왕은 이신의 공로를 크게 칭찬하며 말했다.
"연나라를 평정했으니 이제는 내친김에 초나라도 쳐 없애야 하겠소. 초는 일찍이 연과 함께 연합군을
만들어서 우리를 괴롭혔던 일이 있음으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초에 대한 원수도 갚아야 하오. 장군은 군사를 얼마나 가지면 초를 정벌할 수 있겠소?"
이신은 연전(燕戰) 승리에 도취되어 마음이 몹시 교만해졌는지라, 대왕의 물음에 서슴없이 대답한다.
"20만 군사만 주시면 신이 기필코 초를 섬멸시키겠습니다."
그러나 진왕은 신중을 기하려고 왕전 장군을 불러 이신과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초는 본시 강국이기 때문에 60만 군사를 가져야만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알겠소이다. 물러가서 편히 쉬시오."
왕전이 물러가자, 진왕은 곁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돌아보며,
"왕전 장군이 너무도 늙었구려. 이신은 20만이면 초를 섬멸시킬 수가 있다고 하는데, 왕전은 60만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말을 하니 그러고서야 어찌 용감한 장수라고 말할 수 있겠소 ?"
그러면서 이신과 몽이(夢怡) 두 장군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초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승상 이사가 진왕에게 품한다.
"초와 위는 동맹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초를 치면 위군이 반드시 가세(加勢)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를 치기 전에 먼저 위나라를 쳐야 합니다."
진왕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면 위나라부터 치기로 합시다. 그러면 어느 장수를 보내 위를 섬멸할 수가 있겠소?"
승상 이사는 신중히 생각해 보다가 대답하는데,
"왕전 장군을 총 사령관으로 보내시면 위를 틀림없이 정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진왕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왕전 장군은 너무 늙어서 안되겠습니다. 이신장군은 20만을 가지고 초를 섬멸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왕전 장군은 60만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니, 이렇게 무력해진 노장이 어떻게 위를 섬멸시킬 수 있겠소."
이사는 견해를 달리 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왕명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
"왕전 장군이 너무 늙어서 쓰시기 곤란하시다면, 그의 아들 왕분(王賁)을 보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왕분 장군은 나이는 젊어도, 아버지를 닮아 용감무쌍한 장수이옵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왕분을 이 자리에 부르시오."
진왕은 왕분을 불러 말했다.
"승상의 천거로 그대를 토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군사 10만을 줄 테니, 그대는 위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도록 하라."
왕분으로서는 파격적인 영전인지라 크게 감격하며 맹세한다.
"소신은 대왕 전하의 과분하신 은총에 보답할 만한 전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아니하겠습니다.
왕분은 그날로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위나라 도성인 대량성(大梁城) 부근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폈다.
위왕은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당황하여 군신들에게 물었다.
"진장 왕분이 10만 군사로 우리의 도성을 에워싸고 있으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
늙은 중신이 대답하는데,
"신이 보옵건데 왕분이라는 자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옵니다. 따라서 그는 병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우리가 거짓 항복을 해가지고 그를 생포해 버리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 참, 신묘한 계략이오. 그러면 사술(詐術)을 써서 왕분을 생포해 버리기로 합시다."
위왕은 곧 왕분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할 뜻을 통보하였다.
왕분은 위왕의 서한을 받아 보고 위나라 사신에게 말한다.
"위왕이 항복을 하시겠다니 이런 기쁜 일이 없소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장을 해제하고 기다릴 것이니, 위왕께서 우리 군영으로 오셔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조인(調印) 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소.
나는 그 문서가 있어야만 대왕전에 보고를 올릴 수가 있으므로, 위왕은 반드시 내일 정오경 나를 찾아 주시도록 전해 주시오."
"잘 알겠습니다. 곧 돌아가서 장군의 뜻을 전달해 올리겠습니다."
위의 사신은 왕분이 자기네의 술책에 걸려든 줄로 알고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왕분은 위의 사신을 돌려보내고 나서 장수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위왕은 내가 나이가 어린 것을 깔보고 나에게 거짓 항복을 하고 있으니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오."
장수들은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어떤 점으로 보아서 위왕의 항복이 거짓이라고 판단하시옵니까?"
"생각해 보시오. 그들도 많은 장수와 군사가 있을 것인데, 한 번도 싸워 보지도 아니하고 항복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요? 위왕은 거짓 항복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놓고 오늘 밤쯤 기습하여 일거에 승리를 거둘 계획을 세웠음이 분명하니, 우리는 저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여 오늘 밤 안으로 끝장을 내버려야 하겠소."
그러면서 왕분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렸다.
"우리 군사 8만 명은 4만 명씩 두 대로 나누어 대량성 부근에 잠복해 있도록 하라. 그러다가 오늘 밤 위왕이 우리 본진을 기습하려고 성을 나오거든, 군사의 행렬이 모두 끝나고 성문이 닫히기 전 적의 본거지로 일시에 달려 들어가 대궐을 점령하라. 나는 나머지 군사를 2대로 나누어 거느리고 본진에서 20리 밖으로 후퇴해 있다가, 1대는 적이 내습해 올 시각에 후방으로 돌아가 적의 후미를 공격 할 테니, 20리 밖으로 후퇴하였던 나머지 1대는 정면으로 적을 공격하여 위왕을 대번에 생포하여라."
이렇게 왕분은 적의 야간 기습에 대한 만반의 태세를 세워놓았다.
한편, 위왕은 사신이 왕분을 만나보고 돌아오자 사신에게 물었다.
"왕분을 만났더니 그 자가 뭐라고 하더냐 ?"
"왕분은 우리가 항복하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기네 군사들을 무장 해제까지 시켜 놓을 테니 대왕께서 내일 정오까지 자기를 직접 찾아오셔서 조인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위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왕분이란 자가 우리의 위장 항복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니 그자는 젖비린내 나는 철부지가 틀림이 없구나. 그러면 우리는 오늘 밤을 기하여 적을 일거에 섬멸해 버리고 왕분을 사로잡아 버리기로 하리라."
위왕은 호언장담을 하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친히 진군 섬멸의 장도에 올랐다.
대량성 인근에 매복해 있던 진군은 위왕이 멀리 가 버리기를 기다려, 일거에 성안으로 밀려들어가, 위의 본거지를 손쉽게 점령해 버렸다.
위왕은 그런 줄도 모르고 군사를 휘몰아쳐서 진의 본영으로 기습해 들어갔으나 적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위왕은 크게 당황하여 급히 군사를 돌리려고 하는데, 돌연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오더니 어둠 속에서 적군이 구름떼처럼 아우성을 치면서 엄습해 오는 것이 아닌가.
위왕은 당할 길이 없어서 급히 대량성쪽으로 도망을 치는데 ,
이번에는 왕분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위왕은 왕분의 칼을 받으라 ! "
눈 깜짝할 사이에 왕분의 칼이 달빛에 번쩍이며 허공을 갈랐고,
이어서 위왕의 머리가 마상(馬上)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리하여 위는 나라를 일으킨지 8대 179년 만에 진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17) 연(燕), 위(魏)의 멸망.|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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