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熱國誌) (18) 노장의 지략

이찬조 2020. 1. 1. 07:38

열국지(熱國誌) (18) 노장의 지략

장군 왕분이 위왕의 사술(詐術)을 역이용하여 위나라를 일거에 패망시키고 함양으로 개선해 오자,

진왕은 그를 손수 맞으며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역시 장수는 젊은 사람이야 쓰겠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이신 장군에게 군사 20만을 줄 테니 초나라를 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신은 몽이(夢怡) 장군과 함께 20만 대군(大軍)을 이끌고 자신 만만하게 초나라를 향해 떠났다.

초나라에서는 그런 사실을 탐지하고 급히 중신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노신(老臣) 부추(負芻)가 왕에게 품했다.

"지금 진장 이신과 몽이가 군사 20만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이들을 조속히 무찌르지 아니하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자 초왕은 대장군 <항연>을 불러 명했다.

"장군에게 20만 군사를 줄 테니 시급히 달려나가 그들을 섬멸시켜 버리시오."

항연은 수많은 초장(楚將) 중에서도 맹장으로 소문난 장수인지라 어명을 받들고 즉석에서 대답했다.

"이신과 몽이는 젖비린내 나는 장수들이오니, 무엇을 두려워 하오리까? 신이 곧 달려나가 그들을 생포해 와 대왕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나이다."

항연은 휘하 장졸에게 말했다.

"이신과 몽이는 아무런 계략도 없는 우장(愚將)들이다. 내가 먼저 단신으로 나가 싸우다가 거짓으로 쫒겨 올 테니 그대들은 산협(山峽)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나를 추격해 오거든 일시에 산 아래로 내달아 저들에게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부으라. 그리하면 저들을 쉽게 생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항연은 이러한 작전 계획을 미리 하달해 놓고, 소수의 군사를 대동하고 진군 앞으로 나아가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적진을 향하여 달려 나가며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졸장부 이신과 몽이는 이리 나와 대장군 항연의 청룡은월도(靑龍銀月刀)를 받으라!"

그러자 이신과 몽이는 약이 바짝 올라 검(劒)을 뽑아 말을 타고 항연을 향하여 내달리며 외쳐대었다.

"오냐! 네가 초나라에 늙은 호랑이라 불리는 항연이냐? 오늘 그대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리라!"

양쪽의 장졸이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들판 한 복판에서 1대 2의 장수들의 대결이 펼쳐졌다.

창검이 불꽃을 내며 부딪치기를 30여 합 항연은 일부러 숨을 헐떡이며 쫒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이신과 몽이가 항연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격하기를 삼십 여리,

그러나 산협이 가까워 오자, 이신은 추격을 멈추고 몽이에게 말했다.

"적은 필시 성부 산협(城父山峽)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오늘은 일단 돌아갔다가 부대를 정비하여 수일 내에 본격적으로 쳐들어가기로 합시다. 우리가 동서 두 방면으로 일시에 쳐들어가면, 적을 틀림없이 괴멸시킬 수가 있을 것이오."

몽이도 그 작전 계획이 옳다 여겨 그들은 추격을 멈추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초장 항연은 이신과 몽이가 끝까지 추격해 올 것으로 알았는데, 중도에서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하여 급히 첩자를 보내 알아보니, 적은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본진에서 30리 후방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초장 항연은 첩자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졸들에게 새로운 군령을 내렸다.

"진군은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30리를 후퇴하고 있는 중이라니, 이때야말로 적을 섬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부대가 후방으로 이동할 때에는 경계가 소홀해지는 법이니, 우리가 지금 곧 지름길로 저들을 앞질러 달려가 그들이 지나갈 유곡산협(維谷山峽)에 잠복해 있다가, 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오면 모조리 쳐부숴 버리자."

이에 초군은 빠른 속도로 지름길로 달려가 유곡 산협에서 진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초장 항연의 예상대로 이신과 몽이는 부대 정비를 위한 이동인지라 별로 경계도 아니 하고 한유하게 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곡산협을 절반쯤 통과했을 때, 초군은 별안간 산천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지르며 구름떼처럼 전후 사방에서 들고 일어나 벼락같은 기습을 감행하였다.

무심하게 이동 중이던 진군은 벼락같은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사방으로 개미떼처럼 흩어졌는데, 초군은 덜미를 찍어 누르듯 닥치는 대로 진군의 목을 후려갈기고 등줄기를 사정없이 찔러대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이신과 몽이는 도저히 초군을 당해 낼 길이 없어 그들 역시 <다리야 나를 살려라>하고 허겁지겁 도망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지없이 패배한 채 겨우 5만여 명의 군사만을 거두어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0만 군사만 주면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겠노라고 장담하고 출정했던 이신으로서는 진실로 면목 없는 귀환이었다.

이신과 몽이가 초나라 항연에게 대패하고 돌아오자 진왕은 크게 노하여,

"이신과 몽이의 목을 베어 버려라." 하고 추상같은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신들이 간한다.

"일승일패는 병가의 상사라고 일러옵니다. 더구나 적장 항연은 지용을 겸비한 명장이므로 이신과 몽이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장수들이었으니 바라옵건데 저들의 그동안의 전공을 생각하시와 참형만은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왕은 그제서야 수긍되는 점이 있는지 이렇게 말한다.

"허기는 왕전 장군은 60만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신의 말만 믿고 그에게 20만 명만 주어 보냈으니, 내게도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아무튼 이 원수는 꼭 갚아야 하겠으니, 왕전 장군을 급히 모셔오도록 하오."

왕명에 의하여 노장 왕전이 어전에 출두하였다.

그러자 진왕은 친히 단하(壇下)로 내려와 왕전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내가 불명하여 이신의 말만 믿고 노장군을 경멸했다가 오늘의 참패를 초래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오. 장군은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나와 함께 지략을 모아 초를 다시 치기로 하십시다. 나는 오로지 장군만을 믿겠소이다."

누구에게나 절대 군주로 군림해 왔던 진왕으로서는 처음 있는 겸손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지나친 겸손에 왕전은 오히려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느껴졌다.

노장 왕전은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잠시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왕의 용안에는 언제나 패기와 오만이 넘쳐 있었지만, 오늘따라 왕의 얼굴에는 우수와 불안감이 농후해 보였다.

(명령만 내리면 그만인데 오늘은 어찌하여 신하인 나에게 이처럼 간청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초군에게 패한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초를 거꾸러뜨릴 장수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서, 나에게 애원하는 태도로 나오는 것이 분명하구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왕전은 다시한번 불안감이 느껴졌다. 만약 자기가 초를 정벌해 버리고 나면 왕은 자기를 살려 둘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왕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노신은 병약하여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대왕께서는 다른 현장(賢將)을 등용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나 진왕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애원하듯 말했다.

"내가 믿을 사람은 장군밖에 없으니 수고스런 대로 내 말을 꼭 들어주기 바라오."

왕전은 대왕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끝까지 거역했다가는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어.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질 것 같았다.

왕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룄다.

"대왕께서 기어이 노신을 등용하시겠다면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그러나 지난번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강초(强楚)를 섬멸시키려면 군사가 60만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60만을 드릴 테니, 초를 꼭 정벌해 주시오."

이리하여 노장 왕전은 60만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60만이라면 진나라 백만 대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강한 군사였다.

(내가 만약 이처럼 막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초를 정벌하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게 되면, 대왕은 나의 존재가 두려워서 그때는 나를 죽여 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왕전은 그런 의구심이 없지 않아서 패수(覇水)까지 전송나온 진왕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노신은 대왕전에 부탁 말씀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슨 부탁인지 어서 말씀해 보오."

"황공한 부탁 말씀이오나, 노신은 이번에 공을 세우고 돌아오거든, 여생을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널찍한 장원(莊園)이나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걱정 마오. 초를 정벌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슨 소원인들 들어 드리지 않겠소?"

"다른 욕심은 아무것도 없사오니, 노후에 화초를 가꾸며 농사나 지어 먹을 장원 하나만 하사해 주시면 되옵니다."

"하하하! 걱정 마시래두 그러시는구려."

진왕은 크게 웃었다.

왕전은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초나라로 가는 도중에도 진군 상황을 보고하는 파발마(擺撥馬) 말미에, "소장이 살아서 돌아가게 되거든 장원을 꼭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하는 청원을 세 번이나 올렸다.

왕전의 심복 부하가 그 사실을 알고 왕전을 나무랐다.

"장군께서는 물욕에 탐을 내시는 도가 지나치시옵니다."

그러자 왕전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인즉, 내가 물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 대왕께서는 본시 성미가 난폭한데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품까지 가지고 있지 않으냐? 그런데 내가 우리나라 전 군사의 3분의 2에 이르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나왔으니, 대왕이 나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나는, 아무런 야심도 없는 사람임을 왕에게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보낼 때 <장원 하나만 하사해 주십사> 하고 애원을 하는 것이다."

심복 부하는 그 말을 듣고, 왕전의 용의주도한 지략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전은 초나라의 국도(國都)인 형주성(荊州城) 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왕전은 형주성 근처에 진을 치고 나서도 싸울 생각은 전혀 아니하고 참모들에게 이런 군령을 내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1년쯤 주둔할 예정이니 오늘부터 군사들은 경계병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농사를 지어 먹을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참모들은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장군님!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지, 농사를 지어 먹으려고 온 것은 아니지 안사옵니까?"

"내가 그것을 모를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 초군은 강군이기 때문에 싸움을 조급하게 서두르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은 장기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만 인명 피해도 줄일 수가 있고 승리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휘하의 장졸들은 노장 왕전의 작전 계획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한편 초나라는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왔음을 알고 크게 긴장하였다.

초의 대장군 항연은 장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적장 왕전은 우리가 지난번에 격파한 이신 따위의 풋나기 장수가 아니다. 그는 흉중(胸中)에 깊은 계략을 품고 있는 명장이니 함부로 나가 싸울 생각을 말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수비만 하여라."

이렇게 초군도 방위 일변도의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적의 의도를 알아보려고 이따금씩 싸움을 걸어 보았으나 진군은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왕전은 날마다 장졸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뭐든지 먹고 싶은 대로 배불리 먹어라. 너희들이 잘 먹고 잘 싸워줘야만 전쟁에서 이기게 되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온 최고 사령관이 이렇게 나오니 사병들은 사기가 크게 앙양되어 장군을 존경하는 말을 저마다 입을 모아 애기했다.

"장군님을 위해서라면, 저희들은 신명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이렇게 왕전이 이끌고 온 60만 대군은 초도(楚都) 형주성 앞에 진을 쳐 놓기만 했을 뿐 일체 공격할 기세를 보이지 아니 하니 오히려 성안에 갇혀 있는 초군은 등이 달아올랐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독 안에 몰아넣고 나서 쥐가 독 안에서 제발로 달려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과 똑 같은 형태였다.

초장 항연은 적들이 장기전을 펴고 있음을 알고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며 크게 비웃었다.

"왕전이 지략이 풍부한 백전노장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알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60만 대군을 무슨 군량(軍糧)으로 먹여 살리려고 장기전을 편다는 말이냐?"

그러나 첩자들의 보고를 들어 보니, 왕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적들이 어느 사이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서, 농작이 대풍(大豊)을 이뤄가고 있다>는 보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시간을 오래 끌수록 불리한 쪽은 자기편 뿐일 것 같았다. 초장 항연은 석 달이 넘도록 농성(籠城)을 계속해 오다가 마침내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침내 부장(副將) 마충(馬忠)을 불러 이런 군령을 내렸다.

"적은 싸울 생각을 아니 하고 농사만 짓고 있다니 우리는 이 기회에 적을 섬멸시켜 버려야 하겠다.

나는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적의 후방으로 돌아가 후방에서부터 공격해 나갈 테니 그대는 전면으로부터 적을 쳐 오라. 이렇게 전후에서 협공하면 적을 반드시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항연은 야음을 이용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진군의 후방으로 은밀히 우회하였다.

그러나 첩보망을 거미줄처럼 쳐 놓고 있는 왕전이 그런 적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삼군을 비상 소집해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사란, 하루를 쓰기 위해서 백년을 길러 오는 것이다. (兵者養之百年用之一) 적은 오늘 밤 우리의 전후방에서 동시에 협공해 올 것이다. 전후방으로부터 일시에 양면 공격을 받게 되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60만 대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내가 한 부대를 이끌고 후방에서 쳐들어올 적군을 공격해 나갈 테니, 다른 한 부대는 성하(城下)에 은밀히 잠복해 있다가 마충이 성문을 열고 나오거든 그 기회에 총공격을 퍼부어 형주성을 일거에 점령해 버리도록 하여라. 우리가 개선군으로 고국에 돌아가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반갑게 만나 볼 수 있느냐, 아니면 초국 황야(楚國荒野)에 영원한 고혼(孤魂)으로 헤매야 하느냐는 오로지 오늘 밤의 성패 여하에 달려 있다. 그러니 각자는 사력을 다하여 필승을 기해 주기 바란다."

왕전 장군의 호소는 가슴을 찌를 듯이 간절하여, 60만 대군의 사기는 더할 나위 없이 왕성하였다.

왕전이 군사들에게 행동 개시를 알리자, 부장(副將) 몽선(蒙先)은 30만 군을 이끌고 은밀히 형주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리고 왕전 자신도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장차 초군이 우회해 올 후방으로 출동하였다.

초장 항연은 그런 줄도 모르고,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야음을 이용하여 군사들을 급히 몰아오고 있었다.

왕전은 초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전격적으로 기습을 명령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의 예기치 못한 급습으로 항연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렇게 양군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대 격전이 전개되었다.

함성과 비명 속에서 창검이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피아(彼我)를 분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아우성이 한없이 교차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혼전이 이어졌다.

초장 항연도 천하의 명장인지라 전격적인 기습에 당황 하면서도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쪽이 선수를 쳐서 공격을 퍼붓다 보니 반대쪽은 수세에 몰린 방어 위주의 반격이라,

승패의 결과는 자명할 수밖에 없었다.

초군이 크게 수세에 몰려 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마침내 초장 항연은 왕전을 상대로 백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대장기를 들고 있는 왕전을 향하여 말을 달려 나갔다.

10합, 20합, 30합 ...향연과 왕전은 불꽃 튀는 창검을 겨루며 서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노장 왕전은 거친 숨을 헐떡거리며 말머리를 돌려 쫒기기 시작하였다.

항연은 승부를 결정할 때는 바로 이때다 싶어서,

"늙은 것이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느냐 ...."

하고 비호같이 왕전을 향하여 장창을 내밀어 찌르려는 순간, 왕전이 제비처럼 옆으로 피하면서 장창을 후려갈기니, 항연은 왕전의 일격에 말위에서 굴러 떨어지며 땅바닥 위에 나딩굴어 버렸다.

백전노장 왕전의 거짓 쫒김에 속아서 항연이 어이없이 전사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왕전이 양 군을 향하여 크게 소리를 쳤다.

"너희들의 대장 항연은 이미 나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너희 초군들은 항복하면 죽이진 않을 테니, 모든 초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깨끗이 항복하고 나오라."

하고 말을 하니, 초군은 크게 경악하였다.

그러나 얼른 항복하고 나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항복이란, 군인으로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이었기 때문이다.

왕전은 패장들의 그러한 심리를 알고 있기에,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패전의 책임은 오로지 대장에게만 있을 뿐이다. 모든 장졸이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귀중한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말고,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보존하여라. 누구든지 항복을 하는 자에게는 곧 집으로 돌려보내,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만나게 해주겠다."

왕전의 이같은 제안은 모든 초군에게 눈물겨운 감격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하여 초군 장수들은 서로 간에 눈치를 살피더니 한 장수가 창검을 내던지며 말에서 뛰어내려 왕전 앞에 엎드리자 그 뒤로는 너나없이 칼과 창을 버리고 왕전을 향하여 뒤따라 엎드렸다.

그야말로 말할 것도 없는 무조건의 항복이었다.

왕전은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들은 싸움에는 졌지만, 내 어찌 그대들에게 장수로서의 예우(禮遇)를 소홀히 할 수 있으랴. 그대들은 약속대로 곧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기로 하겠소."

그러자 창검을 버리고 항복한 초군 장졸들은 왕전을 우러러 보며,

"장군의 말씀대로 저희를 고향으로 곧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며 땅바닥에 엎드려 왕전을 향하여 연실 절을 해대었다.

이렇게 왕전은 후방으로 공격해 오던 초군의 뒷수습을 깨끗이 하고 형주성으로 급히 달려갔다.

형주성에서는 부장 몽선이 이미 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에게 선무 공작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초왕 부추(負芻)는 어찌 되었는가?"

왕전의 질문에 몽선이 대답했다.

"마충의 군사들을 때려 부수고, 형주성 내로 들어옴과 동시에, 초왕을 즉석에서 베어 버렸습니다."

"수고가 많았네. 이로써 초를 완전히 섬멸시켜 버린 셈이로구먼!"

이로써, 전국 칠웅(戰國七雄) 중에 강대국으로 자처해 오던 초나라는 나라를 일으킨 지 41대 892년 만에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왕전은 초를 점령하고 나자, 초나라를 <초군(楚郡)> 이라고 개칭하여, 몽선으로 하여금 초군을 지키게 한 뒤에, 자신은 나머지 군사들을 거느리고 급거 함양으로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진왕에게 승전 보고를 올리며,

"늙은 몸이 싸움에 이기고 돌아왔사오니, 대왕께서는 노신의 소원대로 장원(莊園)을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하고 미리 부탁해 두었던 소원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술책이었다.

진왕은 왕전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며 말했다.

"장군이 아니었다면 강초(强楚)를 어찌 이처럼 쉽게 정벌할 수가 있었으리오. 장군의 노력으로 천하 통일의 대업이 한 걸음 성큼 눈앞에 다가온 셈이오. 장군의 소원대로 장원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후작(侯爵)으로 봉하여 국가 최고의 원로로 대접하겠소."

이리하여 왕전은 진왕에게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고, 노후를 안락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18) 노장의 지략.|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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