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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실록 24 - 광종 4

이찬조 2021. 7. 17. 09:21

고려왕조실록 24 - 광종 4
* 얻은 자와 잃은 자....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한 가지는 멍하게 넋을 놓고 앉아서 가진 것을 그냥 내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호족들의 거센 반발과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게 됩니다. 7년이라는 세월을 노심초사 준비하여온 비책인데, 그대로 물러설 광종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정도의 반발과 사회혼란은 통과의례쯤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노비에게는 국가에 대한 병역의무나 세금 납부의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사병으로 동원되어 주인의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는데 이용되었을 뿐입니다.

노비안검법은 이러한 개인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던 노비의 삶을 송두리 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관청으로 달려가 노비가 되기 전에는 양인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신고만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호족들의 손에서 풀려난 새로운 양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국가에 병역 의무를 가지게 되어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결국 태조 왕건에 의해 고려왕조가 열리면서 태생적으로 안고 있던 강력한 지방호족과 왕권의 팽팽한 대립과 공생은 노비안검법의 시행과 함께 그 중심추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게 됩니다.

노비안검법이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자, 광종은 쌍기를 불러들여 후주에서 실시하고 있는 과거제도의 시행을 추진하도록 합니다.

과거제도는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널리 활용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표방하고 있으나 기실은 어디까지나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마련된 제도이었습니다. 과거제가 실시되기 전만 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공신들이나 호족들이 쥐고 있었습니다.

외형상으로 지방 호족들은 자기 지역에 한정되어 제왕처럼 군림하며 중앙의 왕권에 협력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기 자손들이나 친인척, 측근들을 중앙정치에 진출시킴으로써 군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제도가 전격 시행되자, 노비를 잃어 한쪽 날개를 꺾여 날지 못하고 주저앉은 상태에서 꼼짝 못하고 또다시 치명타를 맞게 된 바나 다름이 없게 된 것입니다.

광종의 개혁의 물살은 거세었습니다. 백관의 관복 제도를 체계화하여 서열화 시킴으로서 군왕의 권위가 더욱 높아 보이도록 개정하였는데 이는 과거제를 통하여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관료층이 탄생하면서 자연스레 시행된 제도 중에 하나입니다. 전에는 관복의 체계가 없어서 경제력이 있는 자는 좋은 옷을 입고 그렇지 못한 자는 허름한 옷을 입어 신분과 계급의 구별이 쉽지 않았는데 이제도를 시행함에 따라 임금을 정점으로 한 서열의 구분과 위계질서가 정연해졌습니다.

또한 호족들과 연관이 있는 자들은 왕권으로부터 단절시키면서 개혁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쌍기를 비롯하여 귀화시킨 인물들을 개혁의 주체로 끌어 올렸으며, 차츰차츰 과거제를 통하여 선발한 신진학자층 관료들을 개혁의 또 다른 주체로 키워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