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장기려 박사 ᆢ2018.12.26.

이찬조 2018. 12. 26. 22:33

<장기려 박사.>

 

ㅡ 1995년 12월 25일

 

예수가 탄생한 지 1995년 (12월 25일이 원래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던가, 서력 기원 계산이 잘못되었다던가 하는 반론은 받지 않겠다. 그냥 그렇다고 친다.)되는 해, 예수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을 동쪽의 머나먼 나라에서 평생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의사 하나가 거룩하다고 감히 표현해도 무방한 일평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

 

장기려 자신은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던 의사였다. 1928년 그의 나이 열 일곱에 그는 경성의전에 입학하고 32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스승 밑에서 조교로 일하며 실력을 쌓는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제안 받지만 그를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를 본 한 할머니는 청진기만 대면 병이 낫는 줄 알고 가슴에 청진기를 한 번만 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 의사 얼굴 한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예수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켰지만 그는 의술로서, 그리고 더 크게 인술(仁術)로서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탄압받던 시절, 김일성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부의 뒷조사를 받지만 보위부 일꾼들이 감동할 만큼 그의 행적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평양에 육박할 무렵, 김일성대학 병원 근처에 떨어진 포탄에 놀란 의사들이 사색이 되어 피할 것을 청했을 때 “의사가 되어서 환자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불같은 호령을 내렸던 의사로서의 열정은 기독교를 마뜩지 않아 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먼 훗날 뒤통수에 난 혹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던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가 있었으면 내 몸을 맡길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는 전언이 전해지니 미루어 짐작이 간다.

 

긴박한 전쟁통에 그는 아내와 다섯 아이를 북에 남긴 채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해야 했다. 이윽고 그의 외롭지만 의롭고, 고되지만 거룩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된다. 1951년 1월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전쟁과 가난에 신음하는 바닥의 사람들을 잡아 준 것은 그 시초였다.

 

“무엇보다 잘 먹는 게 중요합니다. 꼭 잘 먹어야 해요.” 의사의 신신당부를 들은 환자는 의사가 써 준 처방전을 들고 원무과로 갔다. 그런데 원무과 직원은 그 처방전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 사람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주고 보내시오.”

 

환자에게 돈 받을 생각보다는 돈 내줄 궁리를 하는 의사는 일단 경영자로서는 실격이다. 직원들의 불만도 있을 법했다. "당신은 처자식이 북에 있지만, 우리는 주렁주렁 남쪽에 달고 살고 있단 말이다! " 투덜거리며 입을 내밀었으리라. 그래서 적잖은 하소연도 하고 압박도 이뤄졌으리라.

 

그때 한 환자가 원장에게 자신의 빈한함을 호소했고 원장은 또 한 번 기가 막힌 처방전을 내린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 뒷문으로 오시오. 내가 문을 열어 두겠소.” 어떤 가난한 여인에게는 아예 탈출을 사주하기도 한다. 치료비가 없다고 호소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짤막하게 기도를 한 뒤 장기려는 눈을 빛내며 말했던 것이다. “기회를 봐서 환자복 갈아입고 탈출하시오.”

 

장기려는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기려는 그렇게 인자한 의사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짖은 예수를 대신하여 한국 기독교계에 침투한 맘몬신을 일생 내내 혐오한 지사이기도 했다.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되고, 특히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대리석으로 으리으리하게 지어지고 그 종탑이 바벨탑같은 한국의 교회들에게서 그는 맘몬의 악취를 맡고 있었다. 그의 말을 계속 옮겨 본다.

 

“나는 무신론,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계급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실로 인류의 여론이다. 부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가 오리라. 이 문제는 다만 부자 계급만의 일이 아니다.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도 어느 정도 재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는 일은 없는가? 아, 크리스챤이 믿음의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단순한 동정심조차 일으키지 않고 조금의 기부금도 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 얼마나 저주받은 사회인가.”

 

성전 앞에서 비둘기 파는 자들을 징치한 예수처럼, 그는 이 말로 우리들 마음 속에서 활개치는 탐욕의 멱살을 잡는다. 그리고 이미 배부른 제사장들의 전유물 , 로마 제국의 무기로 전락해 버린 한국 기독교를 들어 메친다.

 

그는 평생 버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가불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면서도 기력이 있을 때까지 무의촌을 돌면서 자신이 평생 믿고 따른 예수의 사랑을 전했던 그가 60년 의사 생활에서 남긴 것은 천만원이 든 통장 하나. 그는 그 통장마저 자신을 마지막으로 간호했던 간병인에게 전한다.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위해 평생 동안 수절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특혜’라고 거부하는 바람에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떠난 날은 예수가 이 땅에 온 날이었다. 여기에는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다.

 

그의 말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그는 예수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싶어 좀이 쑤실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세워 두거나 달아 놓거나 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