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이규보(고려)

이찬조 2010. 7. 20. 09:24

옛말을 훔쳐내는 일은 죽어도 하지않을 것이오

우리나라 시대별 작가 중 최고는 누구일까요?
신라는 최치원이요.
고려는 이규보이며,
조선은 박지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봉유설` 저자 이수광은 이규보의 글을 두고 유일한 대가의 솜씨라고 평가했다. 이규보가 이처럼 당대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뛰어난 글을 쓴 작가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길로 나아가다 
 = 한 시대 제일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 선배를 극복해야 한다. 이규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16년 연상인 이인로(李仁老)였다. 이인로는 복고(腹藁), 곧 뱃속에 원고를 담아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은 무신정권 시절 최고 문인이었다. 당대 최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중국의 죽림칠현을 모방해 죽림고회(竹林高會)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문단의 우이를 잡았다.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자신들만 최고로 여기고 남들은 무시했다. 그 후 칠현 중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규보를 영입하려 했다. 이규보는 "칠현이 무슨 조정의 벼슬이라고 결원을 채운단 말인가"라고 비꼬면서 참여를 거부했다.

이규보는 선배들 비호 속에 2인자로서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그 선배가 닦아놓은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낯선 길로 나아갔다.
 
 이인로는 옛사람의 글을 열심히 읽어야 저절로 좋은 시가 나온다고 여겼고 또 그러한 방법으로 중국적인 기준에서 원만한 시를 제작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규보는 이러한 창작 방법을 두고 남들의 글을 베껴먹었다고 비판하면서 아무리 도둑질을 잘해 들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둑질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했다.
 
스스로 옛말을 훔쳐내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옛사람의 말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뜻을 창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2. 생각을 뒤집어야 새로움이 나온다 

이규보는 선배와 다른 차별된 길을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문학을 이룩했다. 그의 독창과 개성은 눈에 보이는 사물 외면에 따라 판단하는 진부한 생각을 뒤집은 데서 확보될 수 있었다.

사륜정(四輪亭)이라는 이동식 정자를 창안한 것도 발상의 전환에서 나왔다. 정자는 땅에 붙어 있는 건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정자에 바퀴 네 개를 달아 필요에 따라 옮겨다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 진부한 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중국의 옛 제도에 없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규보는 동명왕의 고사를 장편 서사시로 형상화했다. 사람들은 동명왕 신화를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해 믿지 않았지만 이규보는 환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가 아니고 신(神)이라 하여, 동명왕 신화를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켜 `동명왕편(東明王篇)`은 민족문학의 선성이 됐다.

또 불량한 사내가 큰 몽둥이로 개를 쳐 죽이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이 다시는 개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이규보는 어떤 사람이 이글이글 타는 화로를 끼고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대꾸했다. 객이 머쓱해하면서 큰 동물이 작은 이와 어떻게 같은가 따지자, 이규보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생명체의 공통된 마음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이를 잡으면서(犬說)`라는 글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 주체적인 생태사상의 한 장을 열었다.

3. 아이디어에서 길을 찾다

이규보 시의 새로움은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 한시는 소리의 울림을 중시한다.
그러나 이규보는 이러한 중국적인 기준을 따르지 않았다.
모국어가 아닌 문명의 보편어인 한문으로 시를 지어야 하는 현실에서 이규보는 따라갈 수 없는 소리의 울림보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기발한 뜻을 만들어내는 것을 택했다.
낯선 길에서 얻은 새로움은 `마음에 어긋난 것이 있어 장난으로 시를 짓다`는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9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한다.

"인간 세상 자잘한 일조차 고르지 못하여, 문득 마음에 어긋나 뜻과 맞지 않구나.
풍년에 집이 가난할 때 처가 구박하더니, 노년에 녹봉이 많아지자 기생이 따르네.
외출하려 들면 장맛비 내릴 때가 많더니, 한가히 앉아 있는 날은 늘 날이 갠다네.
배불러 그만 먹으려 하면 양고기가 생기고, 목이 아파 술을 피하려면 큰 술잔이 이르네.
가진 보물을 싸게 팔고 나면 값이 오르고, 묵은 병 낫자마자 이웃에 의원이 이사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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