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54) 영웅 호색(英雄好色)

이찬조 2020. 2. 7. 22:41

열국지 (54) 영웅 호색(英雄好色)

 

일찍이 초회왕이 유방과 항우에게 진나라를 정벌하라는 명을 내릴 때,

"두 장군 중에서 누구든지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고, 나중에 들어간 사람은 그의 신하로 삼게 하겠소." 하는 언약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항우에 앞서서 함양을 먼저 점령한 유방이 <관중왕>이 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방은 함양에 먼저 입성하자 관중왕의 자격으로 모든 장졸에게 아래와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점령국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한다."

그것은 지극히 시의 적절한 포고령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함양의 백성들은 유방의 처사에 감동을 하면서 유방을 자부(慈父)처럼 우러러 모시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군대를 막론하고 전쟁에서 이긴 군대는 패전국의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그러한 폐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성식이 끝남과 동시에 그런 포고령을 내려 백성들의 피해를 사전에 막아 주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함양성 안의 질서는 단시일 내에 확립되었고, 백성들은 오래간만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은 함양성 안의 치안을 확립하고 나자, 대장들과 함께 진황제가 거처하던 궁전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유방은 진나라 황제들이 사용하던 궁전을 둘러보다가, 그 규모가 방대하고 장엄한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나라의 궁전은 시황제가 지어 놓은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하여 금은보화로 장식된 궁전이 무려 36개에 달하였고, 황제가 노닐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유원(遊園)만도 24곳이나 되었다. 그런데 그중의 어느 것 하나도 호화롭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돌아보던 유방과 대장들은 정신조차 황홀해 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대궐 안에 있는 창고 문들을 열어 보니, 그 많은 창고 안에는 금은보화가 넘치도록 쌓여 있는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백성들에게서 금은보화를 저렇게나 많이 수탈해 왔으니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지 않았나?"

유방의 입에서는 역대 진황제들의 죄악성에 대한 성토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엄청난 보물들이 이제부터는 <관중왕>인 자기에게 귀속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자못 흐뭇하였다.

그러다가 유방은 불현듯 진황제들이 거느리던 <3천 궁녀>의 존재가 머리에 떠올라서, "진황제는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애들은 어디로 갔기에 한 명도 보이지 않느냐?" 하고 궁지기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궁지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3천 궁녀들이 거처하는 초방(椒房: 왕비, 왕후 등이 거처하는 합, 후비들의 방)은 대궐 후원에 따로 있사옵니다. 3천 궁녀들은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사오니, 초방도 한번 돌아보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3천 궁녀를 구경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로구나. 그러면 나를 그 곳으로 인도하라."

유방은 <3천 궁녀>라는 말만 들어도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유방이 오늘에 이르기 전에 한량 생활을 할 때에 만났던 많은 여인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그녀들에 비하면 궁녀들은 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뽑혀 나와, 화려한 옷과 수려한 화장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니, 유방은 한시라도 빨리 3천 궁녀들이 거처하는 초방에 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대궐문을 통해 후원으로 나오니, 그곳에는 궁녀들이 거처하는 초방이 수백 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난실 초방(蘭室椒房)이니 경옥 초방(瓊玉椒房)이니 국화 초방(菊花椒房)이니 하는 아담한 궁전 앞에는 미모의 궁녀들이 제각기 사오 명씩 늘어서서 유방을 미소로 영접해 주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만으로 오늘의 영웅을 영접해 주고 있는 궁녀들! 그녀들은 하나같이 20 안쪽의 절세가인들뿐이었는데, 그녀들의 말없는 미소는 대장부의 간담을 녹여 내릴 것만 같이 고혹적이었다.

이를 본 유방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걸음걸음에 정신이 현혹되어 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바로 그날 아침에 유방 자신은 예하 장졸들에게 자기 입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부녀자를 겁탈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

하는 엄명을 내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삼천 궁녀들의 미모에 현혹된 유방은 그 같은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니, 3천 궁녀들을 차례로, 모조리 즐겨 보고 싶은 욕망이 목구멍으로부터 뜨겁게 올라왔다.

그러면서, <나는 관중왕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내게는 저 애들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올랐다.

그리하여 궁지기에게,

"나는 오늘부터 아방궁에 거처할 테니, 나의 숙소를 그곳으로 정하라!"

하고 기가막힌 명령을 내렸다.

수행하던 번쾌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즉석에서,

"주공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옵니까? 진나라가 망한 것은 화려한 궁전과 아리따운 미희(美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공께서도 그들의 전철을 밟아 화려한 궁전과 아리따운 궁녀들에게 현혹되신다면, 그간의 진제(秦帝)들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앞으로 펼쳐질 천하를 어찌 취하시려 합니까?"

동행하던 소하도(簫何)도 옷깃을 바로잡으며,

"번쾌 장군의 간언은 지당한 말씀인 줄로 아뢰옵니다. 주공께서는 이곳에 머물러 계실 것이 아니옵고, 일단 패상(覇上)에 진을 치고, 항우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옵니다." 하고 간곡하게 간언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내 이미 함양을 먼저 점령하였으니, 궁전과 궁녀들은 모두가 내 것이 아니오?"

하면서 아방궁으로 돌아와 용상(龍床)위에 털썩 걸터앉는 것이었다.

소하와 번쾌는 기가 막혔다.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는 누구보다도 황음무도(荒淫無道: 함부로 행하는 음탕한 짓)함을 절제해 온 패공이었건만, 3천 궁녀를 보고 나서는 태도가 이렇게도 돌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하와 번쾌는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장량에게 사람을 보내 그 사실을 급히 알렸다.

그러자 장량이 급히 달려와 유방에게 신랄하게 따지고 들듯이 말했다.

"패공께서는 어인 일로 아방궁에 머물러 계시옵니까? 자고로 영화와 미색에 현혹되면 신세를 망치게 되는 법이옵니다. 패공께서 이곳에 오신 것도 진나라의 학정을 제거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패공께서 진제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와 미색에 현혹되신다면, 진나라의 황제들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충언(忠言)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동에는 이로운 법이고, 좋은 약은 입에 쓰오나 몸에는 좋은 법이옵니다. 그러므로 패공께서는 모든 부고(府庫: 관청의 창고)와 궁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소하와 번쾌의 간언대로 군사를 패상으로 이동시켜 항우가 오기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시면, 항우 장군의 미움을 사서 돌이키기 어려운 불행을 맞게 될 것입니다."

장량이 가차 없이 충고하니, 유방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항우의 미움을 사면 어떤 불행이 초래될지 모른다.>는 말에 유방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은 유방이었다. 따라서 관중왕의 자리는 응당 유방이 차지하여야 옳을 일이다.

그러나 자만심이 강하고 성미가 왈패스러운 항우가 과연 관중왕의 자리를 유방에게 곱게 내줄지는 유방 자신으로서도 크게 염려되는 일이 아니었던가?

유방은 그제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자방 선생의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내가 잘못했소이다. 그러면 군사를 패상으로 이동시켜 놓고 항우 장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겠소이다."

하고 군사들을 그날로 패상으로 이동시켜 놓았다.

패상에 진을 치고 나자, 소하가 다시 간하는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려 왔으니, 주공께서는 노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위안 잔치를 크게 베풀어 주소서. 그리고 주공의 시정 방침인 <약법삼장>도 그 자리에서 널리 선포하시옵소서. 그리하면 백성들의 환심을 사게 되어 앞으로의 통치가 수월하게 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소하의 충고대로 함양성 안에 60세 이상 노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위안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약법 삼장까지 선포하니 백성들이 크게 감동하며,

"바라옵건대, 패공께서는 부디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어 주시옵소서."

하고 축원을 하며 유방을 에워싼 채 언제까지나 돌아갈 줄을 몰랐다.

[출처] 熱國誌 (54) 英雄好色 |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