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55) 범증의 계략

이찬조 2020. 2. 10. 10:24

열국지 (55) 범증의 계략

 

범증은 항우의 허락을 받고, 많은 첩자를 보내 함양에서의 유방의 행적을 소상히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유방은 함양을 점령하고 나서, 백성들에게 눈부신 선정을 베풀고 있음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방이 이처럼 선정을 베풀고 있음은 관중왕이 되려는 준비가 틀림없구나!)

이렇게 판단한 범증은 항우에게 달려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유방이 고향에 있을 때에는 재물을 몹시 탐냈을 뿐만 아니라, 계집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색을 탐했습니다. 그런데 함양을 점령하고부터는 재물은 물론, 아방궁에 있는 3천 궁녀들조차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유방이 관중왕이 되려는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시켜 오고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치면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로구먼. 하하하 ....,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관중왕의 자리는 반드시 내가 차지하고야 말겠소."

하고 예사롭지 않게 흘려 넘기려고 하였다.

범증은 항우가 여유를 부릴수록, 크게 걱정이 앞섰다.

"이 문제는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옵니다."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으면, 유방이 나에게 어쩔 거란 말이오? 아무튼 유방이 관중왕 자리를 내놓기가 섭섭해 한다면, 어느 변방에 왕 자리를 하나 만들어 보내버리면 될 게 아니오?"

항우는 유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지만 범증은 절대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의 대꾸가 자신이 여기는 무거움에 비해서 워낙 가벼운 관계로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범증은 그날 밤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을 찾아가 이런 문제를 상의하였다.

"노공께서 반드시 관중왕이 되셔야 하겠는데, 유방이 그 자리를 양보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소이까?"

항백이 대답한다.

"내 조카가 관중왕이 된다면 난들 얼마나 좋겠소. 그러나 <왕>이란 천운(天運)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못 되는 법이오. 내 일찍이 장량 선생에게서 천문(天文)을 배운 일이 있으니, 오늘 밤 군사와 함께 천문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날 밤 범증은 항백과 함께 천문을 살펴보았다.

대지가 고고히 잠든 구적(俱寂)한 깊은 밤에 산에 올라 성좌(星座)를 살펴보니, 항우가 진을 치고 있는 동쪽 하늘에는 살기(殺氣)가 감돌고 있었는데, 저 멀리 유방이 진을 치고 있는 서쪽 하늘에서는 제왕성(帝王星)이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이었다.

(음 ....., 이럴 수가 .....,)

범증은 내심으로 탄식해 마지않으며,

"항백공께서는 천문을 어찌 읽으셨습니까?"

하고 항백의 견해를 물어 보았다.

항백은 아무런 대꾸도 아니 하고 하늘의 별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범증은 그럴수록 불안스러워서,

"공께서는 천운을 어떻게 보셨는지, 솔직하게 말씀을 해 주소서."

하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항백은 가벼운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패공이 진을 치고 있는 서쪽 하늘위에는 제왕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데, 노공이 진을 치고 있는 동쪽 하늘에는 살기만이 충만하니, 천운은 패공에게로 기울고 있음이 확실한 것 같구려."

천문을 살펴본 두 사람의 견해는 완전히 일치하였다.

(천운이 그렇다면 관중왕의 자리는 유방에게 빼앗기고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전력을 기울여 항우를 보필해 온 범증으로서는 슬프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항백은 범증의 그러한 심정을 눈치채고 넌즈시 물어 본다.

"천수로 보아서는 관중왕의 자리를 유방이 차지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군사는 장차 처신을 어찌 하시려오?"

범증이 결의에 찬 어조로 대답한다.

"천수로 보아서는 관중왕의 자리를 유방에게 빼앗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쇠(盛衰)의 운수란, 반드시 천운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일찍이 제(帝)나라의 신포서라는 사람은 <하늘이 정한 운수는 사람을 이긴다.(천정고능승인: 天定固能勝人)고 하였으나, 또한 노력의 여하에 따라서는 천운을 능히 이길 수도 있다 (인정적능승천: 人定赤能勝天)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이미 신명을 다해 항우 장군을 보필하기로 결심한 몸이므로, 천운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의 생각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주공을 관중왕에 추대 되도록 전력을 다 할 것이옵니다. 다만 공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오늘 밤 우리가 천문을 살펴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옵니다."

백발이 성성한 범증의 결심은 이토록 비장하게 확고부동 하였다.

항백과 범증은 산에서 내려오는 대로 함께 항우를 찾아가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때 유방의 부하인 조무상(曺無傷)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항우에게 한 통의 밀서가 보내져 왔다.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유방은 관중왕이 되려는 마음에서 진황(秦皇)이었던 자영을 재상(宰相)으로 발탁하여, 대각(臺閣)의 모습을 착착 굳혀가고 있사오니 노공께서는 시급히 대책을 강구하시옵소서. 소생은 노공을 진심으로 앙모(仰慕)하는 까닭에 급히 알려 드리는 바이옵니다.>

조무상은 항우와 내통하여 크게 출세를 해 보려고 그런 밀서를 보내 왔던 것이다.

항우는 그 밀서를 받아 보고 크게 노했다.

"유방이란 놈이 분수도 모르고 이처럼 방자하게 나온다면,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로다."

항우는 노발대발하며 당장 군사를 일으켜 유방을 잡아 죽이겠다고 야단법석을 해댔다.

그러나 범증이 침착하게 말했다.

"유방이 재물과 여색을 멀리하는 것을 보면, 그가 관중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사옵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손을 빨리 써야 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신중히 검토해 봐야 할 일이옵니다."

"유방을 잡아 죽이면 끝날 일인데, 검토고 자시고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이오?"

범증이 다시 아뢴다.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셨다가는 큰일 나시옵니다. 병법에 <병력이 10배가 되면 포위하고, 5배가 되면 공격하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유방은 10만 군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30만 군사를 가지고 있으니, 병력의 규모만으로 본다면 우리가 우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방의 휘하에는 번쾌와 주발 같은 용맹무쌍한 장수가 50여 명이나 있는데다가, 장량. 소하 같은 탁월한 모사들도 기라성같이 많사옵니다. 그러므로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라, 유방은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민심을 두텁게 얻어 놓고 있는 관계로, 그의 세력을 결코 가볍게만 볼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유방을 어떤 방법으로 때려잡자는 말이오?"

"신에게 한 가지 계략이 있사옵니다."

"무슨 계략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오."

"내일 밤 삼경에 특공대를 패상에 밀파하여 유방을 사로잡아 오면 모든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과연 묘책이오. 그러면 내일 밤 특공대를 보내 유방을 생포해 오기로 합시다."

범증이 다시 말한다.

"이왕 특공대를 보낼 바에는 장량도 함께 잡아 오도록 하소서."

"장량은 무엇 때문에 .... ?"

"장량을 그냥 두었다가는 보복을 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면 장량도 함께 잡아다가 죽여 버립시다그려."

옆에 앉아 있던 항백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범증이 항우를 위해 유방을 죽이거나 말거나, 자기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와 막역한 친구인 장량까지 잡아다 죽이자는 말에는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출처] 熱國誌 (55) 범증의 계략 |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