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53) 뇌물의 효과로 이룬 대진제국의 멸망

이찬조 2020. 2. 7. 22:38

열국지 (53) 뇌물의 효과로 이룬 대진제국의 멸망

 

여이기와 육가가 진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주는 데 성공하고 돌아오자,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장량을 불러 상의한다.

"적장들에게 뇌물을 주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는 어떡하면 좋겠소이까?"

장량이 대답하는데,

"저들이 뇌물을 받았으니, 머지않아 뇌물의 효과가 반드시 나타 날 것이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뇌물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말씀이오?

"지금까지는 적의 수비가 철통같이 삼엄했지만, 오래지 않아 적의 수비가 허술해질 것이옵니다. 그것이 바로 뇌물의 효과인 것이옵니다."

유방은 얼른 믿어지지 않아서 다시 묻는다.

"뇌물을 받았다고 철통같던 수비가 과연 허술하게 될까요?"

"뇌물이란 상상 외로 무서운 작용을 하는 법이옵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쇠 먹은 똥 삭지 않는다.>란 말이 있지 않사옵니까. 저들은 뇌물을 먹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우리와 내통(內通)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우리에게 성을 빼앗기더라도 자기만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저들의 수비가 허술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옵니다.

지휘관이 결사적으로 싸울 각오가 없는데, 부하 병사들이 어찌 결사적으로 싸우려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수비가 허술해지거든, 그때에 가서 총공격을 퍼부어 무관을 일거에 점령해 버려야 합니다."

"선생의 계략은 참으로 신출귀몰하시옵니다. 그러나 이왕 매수 작전을 쓰기 시작했으니, 싸우지 않고 무혈점령할 방도는 없겠소이까?"

그러자 장량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그것만은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비록 뇌물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세 사람이 제각기 비밀리에 받았기 때문에 성을 그냥 내주자는 말을 아무도 못하게 될 것이옵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가 이름 높은 무장들인 까닭에, 자신의 명예를 생각해서도 자진하여 항복하지도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감시하다가 수비가 소홀해 졌을때 무력으로 탈취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유방은 들을수록 장량의 신통한 계략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리하여 그날부터는 군사 행동을 일체 중지하고, 많은 첩자들을 보내어 적의 동태만을 면밀하게 탐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뇌물의 효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무관성을 굳게 지키고 있는 한영, 경패, 주괴 등은 유방의 <특별한 선물>을 자기만이 받은 줄 알고 저마다 마음이 흐ant하였다. 그리고 세 사람은 제각기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 대장부는 의기(義氣)에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방이 나를 특별히 생각하고 선물을 보내 주면서, <자기가 천하를 호령하게 되면 나를 만호후에 봉해 주겠노라>고 전해 왔으니, 나는 그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뇌물의 효과란 참으로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세 장수의 마음속에는 저마다 사심(邪心)이 생겼는지라 그들의 방비 태세는 날이 갈수록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뇌물 공여 이후 무관성은 단순한 방어 태세만 소홀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세 장수 각각의 속마음에는,

(유방이 무관으로 쳐들어왔을 때, 그에게 적대 행위만 하지 않으면 나는 머지않아 만호후가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어서 세 장수는 각기 혼자서 축하의 술잔조차 기울이고 있었다.

장량은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이러한 세 사람의 동태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의 방비가 완전히 해이해졌음을 알고 나자, 유방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뇌물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관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있겠으니, 출동 명령을 내려 주시옵소서."

유방이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어떤 방법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좋을지, 선생께서 작전 계획을 직접 말씀해 주소서."

"먼저 설구(薛歐)와 진패(陳沛)를 적의 후방으로 깊숙히 잠입시켜 심산유곡에 불을 놓아 적을 놀라게 만든 후에, 패공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쳐들어가시면 무관은 어렵지 않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좋은 작전이외다. 그러나 무관의 지세가 워낙 험악하여 후방으로 잠입하기가 몹시 어려울 것 같은데, 그 점은 어떻게 해결하면 되겠소?"

"지세가 험하여 후방으로 잠입하기가 어려울 것은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 우리에게 귀순해 온 관영(灌英)이 무관 지리에는 자신이 있노라고 말한 바가 있으니, 그를 불러 앞길을 인도케 하면 무난히 잠입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관영을 이 자리에 불러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장량은 즉석에서 관영을 불러 무관의 후방으로 잠입할 길을 물어 보니, 관영은 자신 만만한 어조로 대답한다.

"지형이 워낙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후방으로 직접 잠입할 길은 없사옵니다. 그러나 동쪽으로 70리만 돌아가면 지세가 비교적 순탄하므로, 그곳을 통하면 능히 후방으로 잠입할 수가 있사옵니다.

"그러면 그대가 선봉장이 되어 설구, 진패와 함께 후방으로 잠입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무관 공략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관영이 설구, 진패 등과 함께 사흘 후 자시(子時)를 기해 적의 후방에 불을 놓을 것을 약속하고 떠나자, 유방은 번쾌 등과 함께 그때를 기하여 총공격을 퍼부어 무관을 일거에 점령할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드디어 약속한 시각이 되자, 유방은 번쾌를 선봉장 삼아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노도와 같이 무관으로 쳐들어갔다.

자시는 모든 군사들이 깊은 잠을 자는 시각이었다. 이런 시각에 유방의 군사들이 성벽을 넘어 구름떼처럼 쳐들어가니, 잠들었던 진군들은 크게 당황하여 싸우기 보다는 도망치기에 바빴다.

대장 주괴와 경패는 유방에게서 <특별 선물>을 받은 일이 있는지라, 그들은 숫제 항전할 생각조차 아니 하고 백기를 들고 마중을 나오며,

"나는 진장 주괴입니다."

"나는 진장 경패입니다."

하고 자기 이름을 높이 부르는 것이었다.

자기만은 유방에게 귀순하여 만호후가 되려는 심사가 분명하였다.

선봉장 번쾌가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 크게 웃다가,

"이 배신자들아! 뇌물을 받고 나라를 팔아먹는 너희 놈들을 무엇에 쓰려고 살려둔다는 말이냐!"

하고 호통을 지르며 두 장수를 한칼에 베어 버렸다.

적장 한영은 멀리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크게 당황하였다.

(나도 항복을 해보았자, 결국에는 저 꼴이 될 게 아닌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영은 남은 병졸을 수습하여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하는데, 문득 후방으로부터 누군가가, "적의 선봉이 이미 후방에 깊숙히 침투하여 산과 들에 불을 놓으며 공격해 나오고 있는 중이다." 하고 급히 알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한영은 남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황급히 함양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유방은 무관을 점령하고 나자 그 여세를 몰아 하후영(夏侯英)을 선봉장으로 삼아 함양을 향해 노도와 같이 전진하였다.

때는 한겨울인 10월 초순 새벽, 엄동설한이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그러나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유방의 군사는 추운 줄도 모르고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함양이 바로 눈앞에 굽어보이는 패상(覇上)이라는 곳에 당도하였다.

유방은 일단 그곳에서 전열(戰列)을 가다듬으면서,

"저기 내려다보이는 곳이 진나라의 도읍인 함양 관중(咸陽關中)이다. 최후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으니 모든 장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한 번 더 분전해 주기 바란다."

하고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한편, 함양으로 쫓겨 돌아온 한영은 삼세 황제에게 급히 아뢴다.

"황제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유방이 무관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함양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중이옵니다."

삼세 황제는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라며,

"유방이 함양으로 쳐들어온다고? 그렇다면 어서 중신들을 급히 불러라."

중신들이 급히 대궐로 몰려 들어왔다.

그러나 국정에 밝은 중신들은 조고와 함께 이미 목이 달아났고, 새로 부임한 중신들은 한결 같이 국정에 생소한 사람뿐이었다.

"유방이 함양으로 쳐들어오는 중이라니, 이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 경들은 대책을 급히 말해 보오."

그러나 중신들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정에 어두운 그들에게 신통한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기를 맞아 어찌 대책이 하나도 없단 말이오? 경들은 빨리 대책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상태부(上太夫) 부필(孚畢)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 승승장구해 오는 유방의 대군을 막아낼 길은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폐하와 폐하의 존족(尊族)의 존명(尊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백기를 들고 유방을 직접 영접하시어 항복하시는 길밖에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뭐요? 짐더러 백기를 들고 나가 항복을 하라는 말이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어찌 존명을 보존하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가 있을 것이옵니까?"

그 소리를 듣자 삼세 황제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울부짖듯이 탄식한다.

"아아, 짐은 황제로 등극한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서 시황제께서 이루어 놓으신 대진제국을 망치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비운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러나 통곡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고만 있는데, 시신(侍臣)이 급히 달려오더니,

"폐하! 유방의 군사가 관중(關中)으로 물밀 듯이 몰려 들어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고 급히 아뢰는 것이었다.

삼세 황제도 이제는 죽지 않으려면 항복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항복을 할 것이니 수레를 급히 대령하여라!"

삼세 황제는 마침내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항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옥새(玉璽)를 가슴에 안고, 하얀 수레에 올라 백기를 휘날리며 유방을 영접하려고 원문(轅門)밖으로 마중을 나왔다.

원문 밖에서는 유방의 군사가 노도와 같이 몰려오고 있는데, 선봉장 번쾌가 백기를 먼저 알아보고,

"진황제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러 나오니, 모든 장병들은 공격을 멈추어라!"

하고 큰소리로 호령을 내린다.

번쾌가 삼세 황제를 유방 앞으로 인도해 오자 삼세 황제는 땅에 꿇어앉아 유방에게,

"나는 제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덕이 없기에, 장군에게 항복하여 만백성들을 구하고자 합니다.

장군께서는 이 옥새를 받아 주소서."

하고 말하며 유방에게 옥새를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

유방은 옥새를 받아 들고 크게 기뻐하며,

"그대가 항복을 청해 왔으니, 나는 초왕 전하에게 말씀드려 그대의 목숨은 구해 드리도록 하겠소.

그리고 토지도 많이 하사케 하여 여생을 불편 없이 지내도록 해드리겠소."

유방은 즉석에서 번쾌에게 명하여 진황과 황족들을 모두 한곳에 모여 있게 하였다. 이렇듯 유방의 처분은 어디까지나 관대하였다.

그러나 유방의 관대한 처분을 대장들 모두가 반대하고 나온다.

"진황의 일가는 오늘날까지 대대로 백성들을 괴롭혀 왔는데, 패공께서는 그런 놈을 어찌하여 살려 두시려고 하시옵니까?"

유방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초왕께서 나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을 치게 하신 것은, 내가 관인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내가 만약 항복해 온 진황을 죽인다면, 그것은 대왕 전하의 어의(御意)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이오."

그리고 유방은 입성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모든 장병에게 논공행상을 후하게 내리고,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었다.

이로써 대진제국(大秦帝國)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일찍이 진왕 조정(趙政 : 실상은 여불위의 아들 여정)이 6국을 통일하여 대진제국을 건립하고 자기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불러오게 하면서 이세 황제, 삼세 황제로 대진제국을 자손만대로 계승해 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웅대한 꿈도 흥망성쇠의 천리(天理)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시황제가 기원전 221년, 대진제국을 건립한지 불과 14년 만인 을미년(乙未年) 10월에, 그의 장손 <자영>이 삼세 황제로 등극한지 43일 만에 대진제국은 유방의 손에 의해 깨끗이 망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53) 뇌물의 효과로 이룬 대진제국의 멸망.|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