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59) 홍문(鴻門) 대연회
유방이 항우의 초대를 받고 홍문전(鴻門殿)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날, 홍문전 대전각에는 손님을 영접할 잔칫상이 새벽부터 부산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군사 범증은 연회가 벌어질 현장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나서, 항우를 찾아와 말한다.
"오늘같이 좋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 같사오니, 주공께서는 제가 말씀드린 대로 유방을 반드시 죽여 없애도록 하시옵소서. 그래야만 주공께서 천하를 얻게 되시옵니다."
항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잘 알았소이다. 유방을 틀림없이 죽일 것이니 경은 군사들을 막후에 직접 배치해 놓도록 하시오."
범증은 요소요소에 군사들을 잠복시켜 놓고, 정공(丁公)과 옹치(雍齒)등 두 장수로 하여금 출입문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하였다.
이윽고 한낮이 되자, 유방은 백여 기의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나는데, 유방의 뒤에는 번쾌, 근흡, 기신, 등공 등의 대장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항우 측에서도 험상궂게 생긴 장수들이 요소요소에서 경비를 삼엄하게 하고 있어서 유방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유방을 마중나온 장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으로 소문이 자자한 영포(英布)가 아니던가.
유방은 영포를 바라보며 수레에서 장량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암만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그래도 연회에는 꼭 참석을 해야 하겠소이까?"
장량이 귀엣말로 대답한다.
"저에게 대책이 있사오니, 안심하시옵소서. 다만 항우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만 하시면 되옵니다."
이윽고 유방 일행이 원문(轅門)에 당도하니, 대장 진평(陳平)이 유방을 마중 나와서 말한다.
"연회장에는 패공과 장량 선생만 들어오시고, 그 밖의 사람들은 장외(場外)에서 기다리게 하라는 노공의 분부가 계셨사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유방이 데리고 온 번쾌, 근흡, 기신, 등공 등은 원문 밖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 문전에 당도하니, 주변에는 무장을 갖춘 군사들이 여기 저기 열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유방은 더욱 불안하여 장량에게 다시 묻는다.
"이곳 분위기가 마치 도살장 같은데, 그래도 들어가야 하겠소이까?"
장량이 대답한다.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므로 이제는 조금도 물러서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단 한걸음이라도 뒤로 가는 날에는 저들의 계략에 빠지게 되옵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여기서 잠시만 머물러 계시옵소서. 일단 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전내(殿內)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연회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정공과 웅치가 창검으로 앞을 가로막으며 제지한다.
"패공이 들어가시기 전에는 장내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오."
그러자 장량은 수문장 정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꾸짖듯이 말한다.
"나는 패공의 명령을 받들고 노공을 먼저 만나 뵈러 가는 사람이오. 노공을 먼저 만나 뵈려는 나를 어째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그러나 정공은 녹록하게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 사정이지, 나는 알 바가 아니오. 나는 다만 패공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이 문안으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에 따를 뿐이오."
하며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장량이란 사람이 패공의 분부를 받들고 노공을 찾아뵈러 왔다>는 말씀만이라도 전해 주시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오."
수문장 정공이 안으로 들어가 항우에게 그 말을 전하니, 항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좌우를 돌아보고 묻는다.
"장량이라는 자가 유방보다도 나를 먼저 만나겠다고 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 자리에는 범증과 항백 등이 함께 앉아 있었다.
범증이 얼른 입을 열어 말한다.
"장량은 일찍이 한(韓)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낸 지모가 출중한 모사입니다. 그는 지금 유방을 돕기 위해 패상에 와 있사온데, 장량이 먼저 찾아왔다는 것을 보면, 장량은 필연코 주공을 설득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
장량은 우리에게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오니 차라리 이 기회에 그자도 없애 버리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항백이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범증을 호되게 나무란다.
"주공께서 관중왕이 되시려면 이제부터 인심을 너그럽게 베풀어야 할 판인데, 장량같이 어진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 어쩌자는 것이오. 본시 장량은 나하고는 둘도 없는 친구요. 내가 장량을 설득하여 우리 사람으로 만들고자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니, 절대로 장량을 죽여서는 안 되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숙부와 장량은 그렇게나 가까운 사이요?"
항백이 대답한다.
"우리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입니다. 따라서 주공을 도와 달라고 제가 부탁하면 장량은 결코 거절은 못 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숙부의 말씀을 믿고 장량을 만나 보기로 합시다. 장량 같은 현사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리하여 장량이 잠시 후에 전내(殿內)로 들어왔는데, 전내의 분위기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먼저 항우 자신부터가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데다가, 장검까지 차고 있지 아니한가? 게다가 완전 무장을 한 병사들이 잔칫상 좌우로 무시무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환영연을 베풀기 위한 장소라기 보다는 흡사 도살장같이 살벌한 분위기여서 이것을 보게 된 장량은 가슴이 서늘해 올 지경이었다.
장량은 항우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일부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항우가 궁금한 기색을 보이며 장량에게 말을 먼저 걸어온다.
"장공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어서 말씀을 해보시오."
장량은 그제서야 머리를 조아려 보이며,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생은 이곳에 들어와 보고 전내의 분위기가 매우 못마땅하게 느껴졌사옵니다. 만약 노공께서 허락을 하여 주신다면, 우선 그 점부터 말씀드리고 싶사옵니다."
하고 말했다.
"전내의 분위기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구...?
어떤 점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는지, 소원대로 말해 보시오."
"허락을 내려 주시니 소생이 느낀 바를 기탄없이 여쭙겠습니다. 자고로 명주(明主)가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는 무력으로 위엄을 보이는 데 있지 아니하고, 덕으로 자애를 베푸는데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기에 참된 거부(巨富)는 재산을 믿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참된 강자(强者)는 약한 듯이 보여 위력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노공께서 패공을 초대하여 축하연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옵기에, 그 자리에는 필연코 풍악(豊樂)과 가무(歌舞)가 그득 찬 분위기가 지극히 화락하리라고 소생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하온데 정작 이 자리에 와 보온즉, 장내에는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좌우에 쭉 도열해 있어서 분위기가 너무도 살벌하게 느껴지옵니다. 장내의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해서야 어찌 화락을 즐길 수 있으오리까. 노공께서는 장한과 아홉 번 싸워서 아홉 번을 모두 승리하신 만고의 명장이심은 만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용맹을 굳이 과장해 보이지 않으시더라도 노공의 위세를 누가 모르오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공께서는 손님을 초대하는 이 자리를 삼엄하게 꾸며 놓으셨으니, 그것은 주인으로서의 예의를 벗어나는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이러고서야 겁이 나서 손님이 어찌 마음을 놓고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겠나이까. 현명하신 노공께서는 재고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장량의 변론은 침착하고도 정연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우의 부덕(不德)을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장량의 말에 항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더구나 이제부터 관중왕이 되려는 그로서는<명주는 무력으로 위엄을 보이는데 있지 아니하고 덕으로 자애를 베푸는데 있다>는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명주(明主)>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항우는 즉석에서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무장한 군사들은 장내에 한 사람도 남지 말고, 모두들 물러가 있거라."
그리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벗어 버리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무장한 군사들이 물러가자 장량은 머리를 조아려 보이며 항우에게 다시 아뢴다.
"오늘의 행사는 패공께서 초대를 받고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사오나 실상인즉 진작부터 노공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오늘의 회견(會見)은 노공께서 초청하신 것으로 생각지 마시옵고, 패공이 노공전에 인사로 찾아오신 것으로 생각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패공의 내방(來訪)을 내게 대한 예방으로 생각하고 있으라니 매우 기쁘오이다. 그러면 패공을 속히 들어오라고 하시오."
"패공이 곧 입장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장량이 물러 나가자, 옆에 있던 범증이 항우의 태도에 걱정해 마지않으며 말한다.
"주공께서는 장량의 변론에 결심이 흔들려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애초의 계획대로 유방을 죽이도록 하시옵소서. 그렇지 못하면 후일에 커다란 우환을 초래하게 되시옵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처음의 방침대로 단행하기로 하겠소."
이윽고 유방은 장량을 거느리고 홍문전 연회장에 들어섰다.
유방은 항우와 의형제 결의를 맺은 일이 있는지라, 단상에는 올라가지 않고 단하에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말한다.
"형님을 찾아뵙는 것이 너무도 늦었사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소서."
그러나 항우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는 지라, 단상에서 유방을 굽어보며 다짜고짜 사나운 목소리로 따지듯 묻는다.
"그대는 그동안 세 가지 죄를 지었는데, 그대는 자기 죄를 알고 있는가?"
유방은 허리를 정중하게 굽혀 보이며 대답한다.
"소제(小弟)는 일찍이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을 당시 형님 휘하에 들어와, 진나라를 정벌하는 데 있어서도 모든 일을 형님의 명령대로 거동했을 뿐이온데, 저에게 무슨 죄가 있으오리까. 소제 불민하여 자신의 죄를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대가 자기의 죄를 모르겠다니, 내가 분명히 일러주리라."
그리고 항우는 범증이 미리 일러준 대로 유방의 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그대가 함양을 먼저 점령한 것은 좋았으나 왕명(王命)도 없이 진황(秦皇) 자영을 마음대로 석방해 주었으니 그 죄가 하나요. 둘째, 그대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진나라의 법령을 마음대로 철폐하고 약법삼장을 임의대로 선포해 놓았으니 그 죄가 둘이요. 셋째, 그대는 군사를 파견하여 내가 남전관(藍田關)에 입성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대는 그래도 자기 죄를 모르겠다는 말인가?"
항우의 논고는 자못 추상같았다. 이런 항우의 험상(險狀)으로 보아 유방은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온건하고 침착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어리석기는 하오나, 어찌 형님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형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잠깐만 들어 보아 주소서."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어서 말해 보라."
유방은 다시금 허리를 굽혀 보이며 말한다.
"첫째는 <진황을 석방해 준 데 관한 문제>이온데, 진황이 항복을 해 오기는 했으나, 그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오직 형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제가 좌지우지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붙잡아 놓고 형님이 입성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그를 석방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영 같은 중죄인을 어찌 감히 제가 맘대로 석방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 점, 오해를 풀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고 항우는 수긍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진나라 법령을 어째서 맘대로 철폐했으며, 무슨 이유로 약법 삼장을 선포했는가?"
유방이 다시 대답한다.
"함양에 들어와 보니, 진나라의 학정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백성들은 모두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진나라의 법령을 철폐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바뀐 새 나라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기에 저는 진법을 신속히 철폐함과 동시에, 형님의 덕을 높여 드리고자 약법삼장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저의 처사를 크게 환영하면서, <선봉장이 이렇듯 후덕할진데, 총사령관인 항우 장군이 입성하시면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크고 많은 덕을 베풀어 주실 것인가?> 하고 백성들은 저마다 형님께서 하루속히 입성해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소제는 모든 일을 형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처리했을 뿐이지, 그 외에는 다른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과연 이로(理路)가 정연한 대답이었다.
항우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세번째 죄를 추궁한다.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남전관에 군사를 배치하여 나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은 무슨 이유였는가?"
유방이 다시 대답한다.
"남전관에 군사를 배치했던 것은 형님의 입성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진나라의 패잔병과 도둑들이 난동을 쳤기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님께서는 형제간의 정의를 생각하시와 부디 오해를 깨끗이 풀어 주시옵소서."
유방은 어디까지나 정리(情理)에 호소하였다.
항우는 본시 우둔하고 단순한 성품인지라, 유방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어 보였다.
(음 .... 유방이 나를 위해 자기 딴에는 제법 애를 써 온 모양이구나.)
항우는 그런 생각까지 들자 유방을 의심했던 것이 오히려 민망스럽기 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몸소 단하로 내려와 유방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단상까지 끌어올리며 말한다.
"패공의 설명을 듣고서 나는 모든 오해가 깨끗이 풀렸소. 실상인즉, 패공의 휘하에 있는 좌사마(左司馬) 조무상이라는 자가 <유방은 모반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다>는 밀서를 보내 왔기로, 나는 그 밀서의 내용을 믿고 패공을 일시나마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니 과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조무상이라는 자가 형님에게 어떤 밀서를 보냈는지는 모르오나, 하챦은 자의 밀서로 인해 이 아우에게 일시나마 의혹을 품고 계셨다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옵니다. 하하하! "
하고 일부러 통쾌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항우도 따라 웃으며 말한다.
"내가 아니기로 나를 배반하는 자가 있다는 밀서를 받아 보았다면 누군들 의심을 하지 않으리오.
자, 이제 과거사는 불문에 붙이고 오늘은 술이나 마음껏 마시기로 합시다."
두 사람이 단상으로 올라와 주안상 한복판에 좌정하자 범증, 진평, 장량, 항백 등도 좌우에 배석하였다.
그러자 항우가 시종을 돌아보며 명한다.
"지금 막사에는 점령 지대의 제후(諸侯)들이 나를 찾아와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도 이 자리로 불러 함께 즐기도록 하라."
명령일하, 점령 지대의 지방관들 수십 명이 몰려 들어와 연회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북적이며 성대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백여 명의 악장(樂匠)들이 총동원 되어 삼현 육각의 풍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수십 명의 무희(舞姬)들이 나비처럼 춤을 추고 돌아갔다.
그러나 범증만은 마음이 초조하여 술을 마셔도 술맛이 나지 않았다.
(유방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속아 넘어가 첫번째의 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두 번째의 계략으로 유방을 죽여 버려야 할 것인데, 항우 장군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범증이 항우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보니, 항우는 술을 연방 들이키며 웃고 떠들기만 할 뿐 유방을 죽일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두 번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에는 범증이 술잔으로 식탁을 세 번 두드리면 항우가 손을 들어 신호를 내리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범증이 아무리 술잔을 두드려도 항우는 손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항우는 어째서 약속을 무시하고 손을 들지 않았던 것일까 ?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방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항우가 생각하기에 유방은<죽일 가치가 없는 조무라기 무사(武士)>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증은 유방을 대단한 인물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보아서는 보잘 것 없는 촌부(村夫)에 지나지 않는다.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요만한 위인을 죽인대서야 내 체면이 뭐가 될 것인가?)
항우는 맘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듯 되고 보니 범증은 점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2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제3의 계략대로 유방을 대취(大醉)하게 만들어 가지고 죽일 수밖에 없어서, 범증은 진평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유방에게 술을 권하는 책임을 진평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진평은 얼른 유방 앞으로 달려와 커다란 술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 올렸다.
"패공께서는 이 술잔을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연회에서 본인은 술을 따라 올리는 책임을 맡고 있사옵니다."
진평이 그렇게 말을 하며 유방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유방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제왕지상(帝王之相)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 이렇듯 훌륭하게 생긴 인물을 죽여 없애는 것은 천의(天意)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범증은 사람을 잘못 보고 유방을 죽이려고 하지만, 제왕지상의 인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진평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자 유방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술을 권하면서도 술만은 조금씩 따라주었다.
유방은 진평의 그러한 눈치를 알아채고, 고마운 뜻으로 진평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술을 마시게된 유방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술이 정도를 넘어야만 취한 추태를 보일 기회가 생길 것이나, 주석(酒席)에서의 유방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범절이 또렸하였다.
범증은 제3의 계략마저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방을 오늘 죽여 없애지 않으면 후일에 커다란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할 진데, 이제는 별 수 없이 자객을 시켜 유방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리게 하여야 되겠군!)
범증은 이렇게 결심을 하고 하수인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사방을 둘러보며 적당한 인물을 찾고 있노라니까, 항우의 종제(從弟)인 항장(項莊)이 눈에 띄였다.
(옳지! 저 친구라면 무술도 능(能)하고, 더구나 항우의 동생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유방의 목을 따는 중요한 임무를 기필코 성공할 수가 있겠구나!)
범증은 항장에게 이날의 계략을 상세하게 알려 주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주공은 인정이 많으셔서 유방을 죽이려고 하시지 않으니, 그대가 연회장에서 검무(劒舞)를 추다가 기회를 보아 유방의 목을 반드시 베어 버리도록 하라. 만약 이 일을 성공시키는 날이면 그대는 영원한 공신(功臣)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항씨 일문(項氏一門)은 전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항장이 대답한다.
"유방을 죽이는 일은 걱정을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장은 연회장으로 들어와 항우에게 절을 올리며 말한다.
"무사들의 술자리에는 검무가 따르는 법이온데, 이 자리에는 풍악만 도도할 뿐 검무가 없사옵니다.
제가 검무를 추어 손님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사오니 주공께서는 허락을 내려 주시옵소서."
"검무?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다. 패공께서 멀리서 찾아오셨으니, 네가 검무를 재주껏 추어 주빈을 즐겁게 해 드리도록 하여라."
항우는 남의 속도 모르고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항장은 그때부터 유방의 앞을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장검을 뽑아들고 번개치듯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장량은 그 광경을 보고 큰일났다 싶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항백에게 구원의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항백은 얼른 검을 들고 달려나와 항장의 검무에 함께 어울리면서 말한다.
"검무에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네, 내가 자네의 상대가 될 것이니, 우리 한바탕 어울려 보세나."
항백은 그러면서 항장이 유방의 앞으로 나서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항백이 유방을 죽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고 있기는 했으나 장량은 아슬아슬한 광경을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번쾌를 불러오려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오려니까 수문장 정공과 옹치가 앞을 가로막으며 외친다.
"윗분의 분부가 있기 전에는 아무도 이 문을 나가지 못하오."
장량은 일순간 눈앞이 아뜩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른 기지를 발휘했다.
"패공이 노공에게 드리려고 진나라의 옥새(玉璽)를 가지고 오셨소. 그런데 그 옥새를 번쾌 장군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옥새를 가지러 나가는 길이오."
그러나 수문장들에게는 그 말도 통하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윗분의 분부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내보낼 수 없소."
마침 그때, 조금 전에 유방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여 왔던 진평 장군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진평 장군! 노공에게 바칠 옥새를 가지러 잠깐 밖에 나갔다 와야하는데, 수문장들이 못나가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
장량은 진평에게 큰소리로 호소하였다.
진평은 장량이 무엇 때문에 밖으로 나가려는지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장량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수문장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주공께서 옥새를 빨리 가져 오라고 말씀하셨다. 옥새를 가지러 나가는 사람을 왜 못 나가게 하느냐?"
장량은 그 틈에 밖으로 달려나와 번쾌를 붙잡고 연화장내에서의 긴급 사태를 말한다.
"항장이 검무를 추면서 패공을 해치려고 하고 있으니, 장군이 빨리 들어가 이 일을 막아야 하겠소."
"알겠습니다. 소장이 목숨을 걸고 패공을 지키겠습니다."
번쾌가 장내로 들어가려고 하자 또다시 수문장이 앞을 가로막는다.
"저 사람은 노공에게 옥새를 바치려고 들어가는 사람이오."
번쾌는 장량의 기지로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염라대왕처럼 문간에 버티고 서서 항우를 노려보았다.
번쾌는 키가 9척인 데다가 얼굴은 온통 수염투성이였고, 손에는 장검조차 들고 항우를 노려보는 품이 보기만 하여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험상궂었다.
항우는 번쾌를 바라보고 적이 놀라며 측근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
장량이 얼른 대답을 가로맡는다.
"저 사람은 패공의 경호장(警護將)이온데 이름은 번쾌라고 하옵니다."
"아, 그래요? 과연 장사다운 풍채구려... 여봐라, 저 사람에게 큰 술잔으로 술을 한잔 따라 주어라!"
번쾌는 커다란 술잔을 받자 선 자리에서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항우는 그 광경을 보고 거듭 놀라며 말한다.
"과연 장사로다 ... 더 마시겠는가?"
번쾌가 대답한다.
"소장은 죽음조차 피하지 않을 각오이온데, 어찌 술 따위를 사양하겠소이까?"
항우가 다시 묻는다.
"죽음조차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슨 소린가. 누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있단 말인가?"
번쾌가 다시 대답한다.
"일찍이 진왕은 포악하게도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였기 때문에 천하가 모두 그를 배반했던 것이옵니다. 초회왕께서는 함양에 먼저 입성한 사람을 관중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사실도 있었으나, 패공은 함양을 먼저 점령하고 나서도 재물과 궁녀들에게 일체 손을 대지 아니하고 노공이 입성하시기를 고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공은 그런 공로에 대한 칭찬은 못해 주시나마, 소인배들의 참소의 말만 듣고 항장을 내세워 패공을 해치려고 하고 계시니, 이것은 망진(亡秦)의 폭거와 무엇이 다르오리까? 만약에 항장이라는 자가 패공을 끝까지 해치려고 한다면, 소장이 목숨을 걸고 패공을 구출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번쾌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넘쳐나고 있었다.
항우는 번쾌의 항변을 듣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패공은 나와 함께 이렇게 정답게 앉아 있는데 누가 패공을 해치려고 한다는 말인가? 자네는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네그려."
번쾌가 다시 항변한다.
"아니옵니다. 항장이라는 자가 검무를 추다가 패공을 해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소장이 어찌 그것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자네가 그토록 의심스럽다면 검무를 더 이상 못 추게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항우는 항장을 돌아보며 명령을 한다.
"너는 당장 검무를 중지하고 물러가 있거라 ! "
그러자 항장은 검무를 중단하고 물러가 버렸다. 항우가 번쾌에게 다시 묻는다.
"항장을 쫒아냈으니 이제는 안심이 되는가?"
"이제는 마음이 놓이옵니다."
"그렇다면 이리 와서 나하고 술을 같이 나누세. 패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자네의 충성심에 감탄해 마지않는 바이네."
이리하여 항우와 번쾌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연달아 퍼마시는 바람에 항우는 마침내 정신을 가누기 어렵도록 대취해 버렸다.
장량은 그 틈을 타서 유방을 부추겨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수문장 정공과 옹치가 출입문에 버티고 서서 앞을 가로막는다.
이런 진퇴양난에 빠져 있을 바로 그때, 진평 장군이 눈치를 채고 뒤로 따라 나와 수문장에게 소리를 지른다.
"노공께서 대취하셔서 패공을 돌아가시게 하라는 명령이 계셨으니, 문을 빨리 열어 드려라."
이리하여 장량이 유방을 모시고 밖으로 나오니, 문 밖에는 근흠, 기신, 하후영 등의 장수들이 유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량이 그들에게 명한다.
"패공을 빨리 패상으로 모시고 돌아가오."
유방은 수레에 올라타며 장량에게.
"선생도 나와 함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름어름하다가는 큰일나시오."
장량이 대답한다.
"저까지 돌아가 버리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저는 혼자 남아 있다가 뒷수습을 깨끗이 하고 돌아가야만 후환이 없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뛸 듯이 놀란다.
"이런 위험한 곳에 혼자 남아 계시다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지금 당장 돌아가셔야 합니다."
"제가 뒷처리를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리면 큰 탈이 나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빨라 돌아가시옵소서. 저도 수 일내로 돌아가겠습니다."
장량은 유방을 서둘러 패상을 보내놓고 혼자만 남았다.
유방이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범증은 가슴을 치며 장탄식을 한다.
<아아, 내가 그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웠건만 유방이 살아서 돌아갔으니, 천운이 그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항우 장군이 너무도 우둔한 탓인가!>
[출처] 熱國誌 (59) 鴻門 대연회 |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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