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57)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없는 항우
유방이 무관을 거쳐 함양으로 진군하는 동안, 항우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항우는 장한과의 싸움에서 구전구승(九戰九勝)을 거둔 것을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싸우기만 하면 이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하북(河北) 일대를 쉽게 평정해 가면서 제후들을 모조리 자기편으로 흡수하였다. 그러면서 함양을 향하여 맹진격을 계속하였다. 유방보다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관중왕>을 차지하려고 무리한 전진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서두른 탓인가. 유방은 선무공작으로 적과 화합을 이루면서 전진하는 반면에, 항우는 하나에서 열까지 무력으로 정벌하며 전진했기 때문에 패잔병들의 항전이 끈임 없이 반복되어, 전진하는 속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항우는 부하 군사들의 사기를 알아보려고 혼자서 진중(陣中)을 비밀리에 순찰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막사(幕舍)앞을 지나는데, 등불 밑에 모여 앉은 병사들의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리가 장한 장군을 따라서 항우의 부하가 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어. 항우는 성질이 포악해서 싸움은 잘하지만, 부하들을 사랑할 줄을 모르거든."
"누가 아니래! 유방은 관인 후덕하여 싸우지도 않고 벌써 함양에 입성했다고 하는데, 항우는 날마다 싸우기만 하고 있으니 이래 가지고서야 어느 세월에 함양에 갈 수 있겠나. 주인을 잘못 택한 죄로 우리들만 죽도록 고생하게 되었네."
"제기랄! 지금이라도 항우를 버리고 유방을 따라갈 수는 없을까?"
"이 사람아! 항우와 유방은 앙숙지간(怏宿之間)인데, 될 소리를 하게나."
병사들이 한담삼아 무심코 지껄여 본 불평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그 말을 엿듣고 속에서 천불이 일어났다. 자기보다도 유방을 숭배한다는 말도 비위에 거슬렸지만, 유방이 이미 함양에 입성했다는 새로운 사실에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유방이 이미 함양에 입성했다면, 관중왕의 자리를 그가 차지하려고 할 것이 아닌가? 그 못난 자에게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기다니,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항우는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본영으로 돌아오자, 대장 영포(英布)를 급히 불러 명한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다는 말이 들리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급히 알아보시오."
영포가 즉석에서 대답한다.
"조금 전에 첩자가 알려 온 바에 따르면, 유방이 함양에 입성한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뭐야? 그자가 나보다 먼저 함양에 입성한 것이 사실이라구?"
항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펄쩍 뛸 듯이 소리를 지른다.
항우와 유방, 두 사람 중에 누구든지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이 관중왕이 되라고 말한 것은 초회왕의 어명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설사 유방이 함양을 선점(先占)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관중왕>의 자리를 내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 자리는 자기가 차지할 속셈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유방과의 일전(一戰)도 불사(不辭)할 각오를 하면서 영포에게 명했다.
"장한과 함께 투항해 온 진병(秦兵)들은 모두가 나에게 반역심을 품고 있소. 그들이 반역 모의를 하는 것을 내 귀로 분명히 들었소. 그러니 그들은 함양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를 배반하고 유방에게로 달려갈 것이 분명하니, 그런 일이 있기 전에 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도록 합시다."
영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장한 장군과 함께 투항해 온 병사가 10만 명이 넘는데, 그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는 말씀입니까?"
"10만 명이 아니라 백만 명이라도 반심(反心)을 품고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없애야 하오. 장군에게 20만 명의 군사를 줄 테니, 사흘 안에 산속에 구덩이를 파고 그놈들을 모조리 생매장 시켜 버리도록 하시오. 군령이오!"
항우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내릴 수 없는 무도한 군령이었다.
군령이라는 데는 영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진군 출신 병사들을 모조리 죽여 없앤다면 장한 장군과 사마흔, 동예 등도 함께 죽여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그들은 유능한 장수이니, 그냥 살려두고, 병사들만 죽이면 그만이오."
군사 범증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말한다.
"죄없는 부하 병사를 10만 명씩이나 생매장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주공께서는 군령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흔들며,
"반역심을 품고 있는 놈들이 무슨 나의 부하란 말이오. 그런 놈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여 없애야 하오."
범증이 울면서 다시 말한다.
"병사들이란 취급하기에 따라서 충신도 될 수 있고, 역적도 되는 것이옵니다. 그들이 주공께 어떤 반역심을 품고 있는지 모르오나, 관대하게 살려 주신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바로 돌려놓도록 하겠으니, 부디 죽이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그러자 항우는 화를 벌컥 내며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군사는 무슨 말이 이렇게나 많소?"
그리고 다시 영포에게 명한다.
"영포 장군은 책임을 지고 사흘 안으로 그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 버리시오! "
그리하여 영포는 진군 출신의 10만 명을 사흘에 걸쳐 생매장을 해버리는 끔찍한 참사를 기어코 단행하고야 말았다.
장한을 비롯한 사마흔과 동예 등은 자기의 부하들이 사흘 사이에 몽땅 생매장을 당하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세 장수는 항우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사정한다.
"저희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모양이오니, 저희들도 부하들과 함께 처벌해 주십시오."
항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그대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으니, 조금도 두려워 마시오. 실상인즉, 수일 전에 야간 순찰을 하다가 사병들이 역적모의를 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모조리 죽여 버렸을 뿐이오. 그대들만은 끝까지 중용(重用)할 테니 안심하고 충성을 다해 주시오."
이로써 세 장수는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손발이 잘려 버린 장수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활약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10만 군사를 생매장해 버린 항우는 전군에 새로운 군령을 내렸다.
"최후의 관문인 남전관만 격파하면 함양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 우리는 총력을 기울여 남전관을 격파하자."
항우의 대군은 최후의 관문인 남전관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항우의 군사들이 남전관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다 보니, 성안에서 맹렬한 반격을 가해 오고 있는 군사들은 진나라 군사가 아니라, 우군인 유방의 군사들이 아닌가?
"앗! 성안에서 우리에게 반격을 가해 오고 있는 군사는 진나라 군사들이 아니고 유방의 군사들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선봉장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놀라서, 그 사실을 즉시 항우에게 알렸다.
그러자 항우는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잘못 알았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항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심쩍어서 몸소 일선으로 나와 보니, 성벽 위에서 기운차게 휘날리고 있는 군기(軍旗)는 모두가 유방의 군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유방의 군사는 무슨 까닭으로 남전관에서 항우의 군사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내막은 다음과 같았다.
항우가 진병 출신의 10만 병사를 생매장해 버리고 남전관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유방은 번쾌를 불러 이렇게 물어 보았다.
"항우가 남전관을 점령하고 나더러 관중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텐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번쾌가 대답한다.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이 관중왕이 되기로 한 것은 철썩 같은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그런 약속을 지킬 사람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우의 횡포를 힘으로 막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방은 번쾌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되묻는다.
"항우의 횡포를 힘으로 막아내다니? 그렇다면 관중왕의 자리를 놓고 항우와 싸움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오?"
번쾌가 명쾌하게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항우가 어거지를 쓴다고 관중왕의 자리를 곱게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옵니까? 항우는 남전관을 점령하고 나면,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므로, 우리는 항우가 남전관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힘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실상인즉 유방 자신도 관중왕의 자리를 항우에게 양보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기에 유방은 번쾌의 말대로 설구(薛歐). 진패(陳沛)의 두 장수로 하여금 남전관에서 항우의 군사들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유방의 군사가 남전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목격하자, 전신을 와들와들 떨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유방이라는 놈이 관중왕이 되려고 이런 수를 쓰고 있는 모양인데, 제 놈이 감히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항우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즉시 전군에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유방이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이자는 이미 우군(友軍)이 아니고 우리의 적이다. 우리는 30만 대군을 총동원하여 유방을 단숨에 섬멸시켜 버리자."
그러자 범증이 앞으로 달려나와 항우에게 아뢴다.
"유방이 우리를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기가 관중왕이 되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만약 관중왕의 자리를 유방에게 빼앗기신다면 주공께서는 천추에 한을 남기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분 사이에는 형제의 결의(結義)를 맺으신 일도 있으니, 싸울 때 싸우더라도 우선은 서한을 보내어 유방을 설득해 보심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충고를 옳게 여겨, 우선 영포로 하여금 남전관을 에워싸게 하고 유방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화살에 매달아 쏘아 보냈다.
<나 노공 항우는 의제(義弟)인 패공 유방에게 글을 보내오.
공과 나는 지난날 회왕 앞에서 결의형제를 맺고, 진나라를 함께 치려고 나섰소. 그 후 공이 나보다 먼저 함양에 입성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진장 장한을 항복시킨 것을 비롯하여 많은 제후들을 굴복시키면서 지금 남전관에 이르렀소. 그런데 공은 나의 공을 가로채어 관중왕이 되고자 나를 이곳에서 저지하고 있으니 이 어찌 대장부가 할 일이겠소. 내가 만약 남전관을 때려 부수고 들어가면 공으로서도 면목없는 일이 될 것이니, 관문을 속히 열어 우리 두 사람의 형제지의(兄弟之誼)를 새롭게 합시다.
후일에 뉘우치는 일이 없도록 거듭 선처하기를 바라오.
의형(義兄) 노공 항우 씀 >
유방은 항우의 서한을 받아 보고, 즉시 참모회의를 열었다.
"항우가 이런 글을 보내 왔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
장량이 대답한다.
"항우는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데 우리 군사는 10만에 불과하므로 힘으로는 항우를 당해 내기가 어려울 것이옵니다. 만약 싸우다가 패하는 날이면 패공께서 포로의 신세를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저쪽의 요구대로 관문을 순순히 열어 주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관중왕의 자리를 항우에게 넘겨주자는 말씀입니까?"
"그 문제와는 애기가 다르옵니다. 관중왕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함양에 먼저 입성하신 패공께서 차지하셔야 하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소. 그러나 그 자리를 항우가 빼앗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이처럼 복잡하게 된 것이 아니겠소?"
"그 문제는 그때에 가서 해결해도 됩니다. 그 문제가 두려워서 처음부터 싸움으로 해결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옵니다."
"그러면 나는 선생만 믿고 남전관의 관문을 열어 주기로 하겠소이다."
유방이 관문을 열어 주라는 명령을 내리자, 대장 설구(薛歐)가 관문을 활짝 열고 항우의 선봉장인 영포를 맞아들이며 말한다.
"우리가 남전관을 굳게 지켜 온 것은 항우 장군의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나라 패잔병들의 난동을 막기 위한 처사였소. 패공께서는 항우 장군의 서한을 받아 보시고 관문을 속히 열어 항우 장군을 정중히 영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항우 장군께서는 신속히 입성하시도록 해 주십시오."
영포가 그 말을 항우에게 전하니, 항우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점관으로 당당하게 입성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유방이 제아무리 함양을 먼저 점령했기로 내가 누구라고 감히 내 앞에서야..."
하고 어디까지나 유방을 깔보는 호기를 부렸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항우는 남전관에 들어와 홍문(鴻門)에 진을 치고 나자, 유방이 직접 영접해 주지 않은 것이 매우 못마땅해서,
"유방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보이지를 않느냐?"
하고 설구에게 물었다.
"패공께서는 지금 패상에 계시옵니다."
"음, 알았다. 곧 나를 만나러 오겠지."
항우의 말은 어디까지나 유방을 자신의 부하로 여기는 말투였다.
그러나 범증은 아무리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항우에게 이렇게 귀띰을 해주었다.
"유방이 직접 영접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태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유방이 지금 패상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동안에 그의 행장(行狀)을 소상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조사해 보시오."
안되는 것도 없지만 되는 것도 없는 항우의 명령이었다.
[출처] 熱國誌 (57) 안되는 것도 없지만 되는 것도 없는 항우|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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