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58) 범증의 배후 모계

이찬조 2020. 2. 11. 12:33

열국지 (58) 범증의 배후 모계

 

한편, 다음날 밤 항우는 특공대를 보내 유방을 체포해 올 시간이 다가오자 모든 장수들 에게 비상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이 중군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항백만은 보이지 않았다.

범증이 좌중을 둘러보며 묻는다.

"항백 장군이 웬일로 나타나지 않는지, 누구 모르오?"

그러자 당직장(當直將)인 정공(丁公)이 대답한다.

"항백 장군은 어젯밤에 혼자서 패상 방면으로 말을 달려 나가셨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범증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항백 장군이 한밤중에 무슨 일로 패상 방면으로 달려가시더란 말인가?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니냐?"

"본인이 직접 보았으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그래 ? 그렇다면 항백 장군이 우리의 기습 기밀을 유방에게 알려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군그래,

그렇다면 오늘 밤의 계획은 중지를 해야 하겠군!"

하며 범증이 분노에 찬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항우는 범증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군사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항백 장군은 나의 아저씨가 아니오

나의 숙부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 심한 말씀인 것 같구려."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항백 장군이 고의로 배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 이 말 저 말을 하다가 무심중에 군기(軍機)를 누설할 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하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오늘 밤의 계획은 일단 중지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이 모양으로 항우와 범증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바로 그때, 문제의 인물인 항백이 좌중으로 급히 달려 들어왔다. 장량과 작별을 하고 지금 막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항우는 항백을 보자 분노에 찬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숙부는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시는 길이오?"

항백은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했다.

"나는 나의 친구인 장량을 만나러 갔다가 지금 돌아오는 길이오."

항우는 그 소리를 듣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한 손으로 움켜잡으며 벼락같은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까닭으로 장량을 만나러 갔는지 그 이유를 사실대로 밝히오. 만일 군기를 누설하고 오는 길이라면, 비록 숙부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는 없소!"

항우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좌중의 장수들은 한결 같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로 인해 좌중에는 별안간 살기가 등등해졌다.

항백은 침착하게 대답한다.

"나는 장량에게 군사 기밀을 알려 주려고 패상에 갔다 오는 것은 아니오. 그 점에 대해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소."

"군사 기밀을 알려 주지 않으려면 무엇 때문에 장량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란 말이오?"

항백이 다시 대답한다.

"주공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금 유방의 휘하에 머물고 있는 장량은 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요. 오늘 밤 우리가 저들에게 기습을 감행하게 되면 장량이 억울하게 희생될 것 같기에 나는 그 친구를 구해 주려고 갔던 길이오."

"장량을 구하러 갔다면, 어찌하여 장량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았소?"

항우의 추궁은 가차 없이 맹렬하였다.

항백이 다시 대답한다.

"나는 장량의 말을 들어 보고, 우리가 유방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이왕이면 모든 사실을 당사자인 유방에게서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나중에는 대담하게 유방까지 만나 보았던 것이오."

"엣? 유방까지 만나 보았다구요? 그래서 유방을 만났더니, 그가 뭐라고 합디까?"

여기서 항백은 <유방은 관중왕이 되려는 의사가 전혀 없더라>는 말과 함께, <유방은 진나라의 대궐과 재물을 고스란히 보존해 오면서 항우가 하루속히 입성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더라>는 말을 조목조목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유방의 누이동생을 후취로 맞아 오기로 하였다는 사실만은 끝까지 비밀에 붙여 두었다.

항우는 항백의 말을 듣고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띄며,

"숙부의 말씀은 거짓이 없는 사실이겠지요?"

하고 다짐을 하듯 물었다.

항백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이런 거짓말을 하겠소이까. 그렇지 않아도 유방은 수삼 일 안으로 주공을 찾아뵈러 올 테니, 나더러 그 말씀을 꼭 전해 달라고 하더이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한다.

"그러면 그렇지! 유방이 감히 나에게 어쩔 것인가?"

그리고 이번에는 범증을 돌아다보며 말한다.

"지금 숙부의 말씀을 들어 보면, 유방이 딴뜻을 품고 있지 않음이 분명한 것 같구려. 그러니 죄 없는 그를 함부로 잡아오게 되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 같으니, 오늘 밤의 계획은 취소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범증은 항우의 의견에 끝까지 수긍하려고 하지 않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항백 장군은 유방과 장량의 심오한 계략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유방을 지금 처치해 버리지 않으면, 후일에 반드시 큰일을 당하시게 되실 것이옵니다. 따라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번 기회에 단호하게 처치해 버리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충고를 웃음으로 들어 넘기며 말한다.

"군사는 유방을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이지만, 실상인즉 유방은 촌무사(村武士)에 불과한 친구요. 그런 친구가 설사 야망을 품고 있기로, 감히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소. 유방이 일간 나에게 인사를 오기로 했다니, 그때 가서 처치를 하든가 어쩌든가 합시다."

항우는 유방을 어디까지나 과소평가를 하고 있었다.

범증은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어 특공대를 해산하고 숙소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유방을 지금 처치해 버리지 않으면 후일에 항우가 반드시 유방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 된다! 나는 이미 항우에게 신명을 다해 충성을 하기로 결심한 몸이 아닌가? 유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항우가 그로 인하여 반드시 비참하게 될 것을 예측하고 있으면서 그냥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다!)

범증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새벽같이 항우를 다시 찾아가 말한다.

"유방을 살려 두었다가는 주공에게 크게 불리할 것이오니, 내일 이라도 그를 이곳으로 불러 죽여 버리셔야 하옵니다."

항우가 웃으면서 반문한다.

"군사는 유방이 그렇게도 큰 인물이라고 생각하시오?"

"유방은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이고 있으나, 실상인즉 내심은 말할 수 없이 음흉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기어이 죽여버리셔야합니다."

"군사가 그렇게까지 걱정되신다면, 내일 이라도 그를 초청하여 죽여 버리기로 합시다그려. 죽인다면 어떤 방도로 죽이는 것이 좋겠소?"

 

"유방을 죽이는 데는 세 가지 방도가 있사옵니다. 첫번째는 홍문전(鴻門殿)에 환영연을 베풀어 놓고 유방이 그 자리에 나타나거든 주공께서 몸소 영접을 나가셔서 즉석에서 목을 베어 버리는 것이온데, 그것이 최선의 상책(上策)이라고 하겠습니다."

"음 ....., 내 손으로 유방의 목을 직접 쳐버리라는 말씀인가요?"

항우는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또 다른 방법은?"

하고 물었다.

범증이 다시 대답한다.

"주공께서 직접 손을 쓰시기가 싫으시거든, 막후(幕後)에 2백여 명의 장사들을 미리 숨겨 두었다가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그들로 하여금 유방의 목을 쳐버리게 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주공께서 직접 목을 치시는 것처럼 확실하다고는 볼 수가 없겠습니다."

"음 ...., 또 다른 방법은?"

항우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또 다른 방법을 물었다.

"세 번재 방법은 .....,"

범증은 잠시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다시 말을 한다.

"세 번째의 방법은 유방을 대취(大醉)하게 만든 후에, 그가 취중에 실수를 하는 경우, 꼬투리를 잡아서

그것을 구실로 유방을 즉석에서 죽여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서 최하책(最下策)이옵니다."

"잘 알았소이다. 그러면 세 가지 중에서 형편에 따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지금이라도 유방에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시오."

범증은 항우의 이름으로 유방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나 노공은 패공에게 초청의 글월을 보내오.

우리 두 사람은 회왕의 어명을 받들고 멸진 정도(滅秦征途)에 동시에 올랐건만, 패공이 일찌감치 함양에 들어가 나보다 먼저 개가(凱歌)를 올렸으니, 이는 진실로 만천하가 다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오. 따라서 본인은 장군을 위해 명일 홍문전에서 축하의 대연(大宴)을 베풀어 드리고자 하니,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꼭 왕림해 주기를 바라오.>

유방은 항우의 초청장을 받아 보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리하여 모든 참모들을 불러 진지하게 상의한다.

"노공이 나에게 축하연을 베풀어 주겠다고 초청장을 보내 왔는데, 이것은 어쩌면 나를 죽이기 위한 술책일지도 모르오. 섣불리 달려갔다가는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가는 노여움을 사서 더욱 곤란해질 것 같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소 ?"

소하(蕭簫何)가 먼저 대답한다.

"항우의 세력은 우리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막강합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실력으로 겨루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러므로 변설에 능한 광야군(廣野君 : 여이기)을 보내, 관중왕의 자리는 일단 항우에게 내주기로 하고 우리는 조그만 고을 (郡)이나 하나를 달라고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 연후에 우리가 세력을 길러 가지고 다시 그 자리를 다시 빼앗아 오는 장기 정책(長期政策)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이기가 소하의 말을 받아 아뢴다.

"저 역시 소하 장군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신다면 저를 보내 주시옵소서."

이 말까지 나왔을 때,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량이 문득 반대를 하고 나온다.

"심히 외람되오나, 두 분의 의견에 대해 저로서는 찬성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장량이 정면으로 반대를 하고 나오는 바람에 유방은 더욱 불안하였다.

"선생은 무슨 까닭으로 반대를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소서."

장량이 조용히 입을 열어 대답한다.

"만약에 패공께서 항우의 초청을 받으시고도 시해(弑害)될 것이 두려워 홍문연(鴻門宴)에 참석을 아니 하신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항우의 기개에 굴복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사옵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굴복을 당한 사람이 어찌 재기(再起)인들 쉽사오리까? 그러한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음 ..... 그러니까 죽는 한이 있어도 항우의 초청에는 반드시 응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입니다. 그 옛날 오자서(伍子胥)는 진왕(秦王)의 손에 죽을 것을 각오하면서 평왕(平王)을 따라 임동회(臨潼會)에 참석했기 때문에 후일에 만천하가 우러러보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옵니다.

만약 오자서가 죽음이 두려워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회피했다면 오늘날 오자서의 이름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생의 말씀은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항우의 초청에 반드시 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패공께서 장차 천하를 도모하실 웅지(雄志)를 품고 계시다면 항우를 조금도 두려워 마시고 당당하게 만나러 가십시오. 이번 초청건은 범증이 배후에서 꾸민 모계(謨計)임이 분명하온데, 패공께서는 범증이 세운 모계를 타개(打開)해 버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용기를 크게 얻었다.

"선생은 참으로 천금 같은 말씀을 들려주셨소이다. 그러나 범증은 술수가 대단한 모사인데 어떡해야 그의 술수를 벗어날 수 있을지 매우 걱정스럽소이다."

장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얼굴을 들며 말한다.

"저는 한대왕(韓大王)의 어명을 받들고 패공을 도와 드리고자 온 몸이옵니다. 그러니 홍문연 연회에 참석하실 때에 저를 데리고 가주시면, 제가 어떡해서든지 범증의 모계를 막아내어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소하와 여이기가 쌍수를 들어서 찬성하였다.

"장량 선생께서 동행해 주시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든든한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제서야 얼굴에 희색이 돌아오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 홍문연 연회에 장량 선생과 함께 참석할 것이니, 그 사실을 항우 장군 측에 급히 알리오."

급사가 달려가서 그 사실을 항우에게 알리니, 범증은 그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유방이 죽을 줄도 모르고 온다니, 이제야 나의 그물에 걸려들었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유방의 생사 문제는 오로지 범증과 장량의 지략 싸움에 달려있게 된 셈이었다.

그 두 사람 중에 과연 누가 승자가 되고 패자로 될지? 그 결과는 두고 보아야 할 노릇이었다.

[출처] 熱國誌 (58) 범증의 背後 謨計 |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