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30)> 단종 세조 8- 한 마리 원통한 새

이찬조 2021. 3. 27. 07:49

<조선왕조실록(30)> 단종 세조 8
- 한 마리 원통한 새

단종은 그 유명한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곧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영월 객사로 나와 살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왔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자, 단종은 스스로 목을 메고는 줄을 창 밖으로 빼내 당기게 하여 자살을 하였답니다.

이 외에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단종의 죽음 경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만큼 단종이 어이 없게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 때 단종의 나이 열일곱, 즉위한 지 5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권력 추구의 희생양이 되어 얼마 되지도 않는 생을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다 이렇게 쓸쓸이 죽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단종의 시신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고을 향리인 호장 엄홍도가 거두어 장사를 지냈고, 중종조에 이르러서야 단종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무덤을 찾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이 밝혀졌으며, 단종이란 묘호를 받고 능으로 단장된 것은 숙종때의 일입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와 남편을 잃고 폐서인이 된 단종의 부인 송씨는 동대문 밖에 조그만 초가를 짓고 살았는데,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이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여든 두 살까지 장수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단종의 이러한 죽음에 가장 앞장 선 종친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내 준 양녕대군입니다. 양녕대군은 종실의 제일 큰 어른으로서 수양의 쿠데타를 막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지만, 스스로 수양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생인 세종의 손자인 단종을 죽음으로 모는데 결정적 지원자가 됩니다.
태종이 뿌린 살육의 업보가 여기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다음은 단종이 영월객사에서 지내며 지은 시라고 하는데, 참으로 심금을 울립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에서 쫒겨나와
외로운 몸 그림자 푸른 산 헤매네
밤마다 자려해도 잠은 오지 않고
해마다 한을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구나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엔 어스름 달 비추고
봄 골짜기엔 피 토한 듯 떨어진 꽂이 붉어라
하늘은 귀먹어서 이 하소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서러운 이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