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68)> 선조 16 - 행주대첩

이찬조 2021. 4. 15. 06:56

<조선왕조실록(68)> 선조 16 - 행주대첩

드디어 파병 결정을 한 명나라.

파병결정 후 처음 조선으로 들어 온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왜군을 얕잡아 보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명나라군 4천 5백, 조선군 3천을 잃는 대패를 하였습니다.

그 후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온 이여송은 조선으로부터 작전권을 인수한 후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곧바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사실, 전쟁 시작과 함께 패배를 모르며 북진을 계속 해 온 고니시의 제1군은 이즈음 이순신으로 인해 서해 바다를 통한 증원군과 군수품 지원이 막힌 데다 조선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에 조명 연합군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기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평양성 점령 6개월 만에 왜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한양으로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기세를 타고 남진을 계속했습니다.

한편, 한양에는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왜군이 집결했고, 이들은 강하게 반격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 4만의 병력을 총 동원해 벽제관에 진을 쳤습니다.

평양성에서 판 맛을 본 이여송은 일본군을 일거에 칠 기세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일본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이여송은 대패를 하고 개성으로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즈음 광주 목사 권율은 일본군이 한양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향후 명나라 군대가 한양을 칠 때를 대비해, 2-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벽제관 패배로 겁을 먹은 이여송은 개성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전략상 요충지인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영 신경이 쓰였던지 무려 3만의 군사를 동원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권율은 산성 아래에 이중으로 목책을 설치하고 포진지를 구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곧 적은 해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된 화포와 다연발 신기전,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병사와 군민의 대 투혼에 권율 장군의 지략이 더 해진 불퇴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일곱 차례에 걸쳐 대 공세를 펼쳤으나 모두 무위로 끝나고, 결국 일본군은 한양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입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요충지를 확보하지 못해 전체 전략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반면에 조선은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