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67)> 선조 15 - 반전의 토대

이찬조 2021. 4. 15. 06:55

<조선왕조실록(67)> 선조 15 - 반전의 토대

전회에서 의병의 활약과 희생에 대해 살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왜란 통에 모든 백성이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서 싸운 것은 아닙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왕자들을 곳곳에 파견해 백성들을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램)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을 그곳 백성들 중 일부가 붙잡아 왜군에게 넘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그곳에서도 백성을 수탈하기에 바빴는데다,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 이후 이곳 백성들에 대한 차별이 커 원성이 컸고, 게다가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이 지역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요

한편,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언제든지 요동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명은 선조의 요동행 타진에, “부득이 오겠다면 인정상 막지는 않겠으나, 그럴 경우라도 인원을 백 명 이내로 하라”라는 싸늘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파병요청에도, 조선이 함락된 게 아니라 앞장서서 왜군의 길안내를 한다는 의심을 하여, 여러 경로를 거쳐 현황을 파악한 후 파병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즈음 조선은 자체의 역량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꿔가고 있었습니다.

즉,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과 의병들의 분전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고(우리도 이길 수 있다!), 권율, 김시민 등 유능한 장수들이 지휘를 맡게 된데다, 고려 말 그리고 세종 조에 개발에 힘쓴 천자총통 등 화약무기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왜군과 싸움다운 싸움을 할 기반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조선의 저력이 발휘된 대표적인 싸움이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입니다.

왜군은 이순신으로 인해 수로를 통한 호남 진출이 좌절되자 육로를 통한 호남 진격의 일환으로 진주성을 치기로 했고, 이 싸움에서 김시민은 진주 백성들 그리고 곽재우 등 의병과 힘을 합쳐 장장 6일간의 전투 끝에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쾌거를 이루니, 이로써 조선의 혼이 살아 날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