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6 - 충선왕 3

이찬조 2021. 8. 29. 09:36

고려왕조실록 106 - 충선왕 3

- 다시 임금은 되었으나 ---

 

 

1308년 5월 즉위한 원나라 왕 무종은 자신이 정권다툼에서 승리하자 그간 충선왕이 세운 공이 적지 않았음을 들어 바로 충선왕을 원나라의 영지중 하나인 삼양왕에 봉하여 줍니다.

 

이로서 충선왕은 원에서도 굳건한 기반을 다질 수가 있었는데, 그해 7월 부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충선왕은 복위하자마자 정치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자제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 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과 같은 조치 들이 담긴 혁신적인 교서를 발표함으로서 다시 한 번 개혁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선왕의 교서는 일회성 구호에만 그치고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여러차례 원나라에 다녀 온데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10여 년 동안을 원나라에서 살다보니 그곳의 생활이 습관화가 되어 고려에서의 생활이 따분하기만하고 차츰 정치에도 흥미를 잃어가게 되면서 원나라로 돌아갈  빌미만 찾던 충선왕은 복위한지 두 달 만에 숙부제안대군 왕숙에게 치세를 대행케 하고는 원나라로 돌아가 버립니다.

 

고려에 남은 대신들은 당연히 왕이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지만 충선왕은 재위기간 동안  한 번도 귀국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장기간 자리를 비워버리니 정치는 파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는데 중요 국사가 있을 때마다 일일이 사람을 보내서 왕의 전지를 받아 국정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의 충실한 부하들이 죽치고 있는 판에 마음대로 국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왕이 오랜 세월을 국외에 기거하니 본국에서는 해마다 포 10만필, 쌀 4000석 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은 물자들을 원나라로 운반해야만 했습니다.

 

참다못한 대신들은 왕의 귀국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원나라에서도 귀국을 종용하였지만 충선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왕이 돌아올 것을 간청하던 신하들이 마침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세자 감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충선왕의 심복들은 이를 즉각 충선왕에게 알렸고 이 때문에 끔찍한 참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세자 감과 그를 추대하고자 했던 김의중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이로서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것조차 어려워지자 신하들이 다시 충선왕의 귀국을 종용하자 원나라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던 충선왕은 귀국 대신에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전위할 뜻을 밝히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충선왕은 이 부분에서 두고두고 분란의 씨앗이 될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자신의 이복형이기도한 강양공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내세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왕고는 훗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에 뛰어들어 숱한 분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충선왕은 아들 도의 즉위식에 참석하기위해 1313년 6월 잠시 귀국하였으나 즉위식이 끝나자 바로 이듬해 원나라로 돌아가 버립니다.

 

고려로 돌아가라고 강권하던 원나라도 충선왕이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다시 돌아오자 연경에 체류해도 좋다고 승인해주자 연경의 사택 안에 만권당을 신축하고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인 염복, 요수, 조맹부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구하며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1320년 원나라 왕이 바뀌게 되자 충선왕은 고려 출신 환관 임빠이엔또쿠즈의 모략으로 토번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다행히 1323년 태정제로 임금이 바뀌면서 유배지에서 풀려나긴 하였으나 한나라의 왕이 그리도 구차한 일을 당하면서까지 원나라 생활을 고집한 충선왕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토번에서 3년여의 유배 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충선왕은 풀려나고 나서 2년 뒤인 1325년 12월5일 운명을 달리하게 되니 재위 5년에 향년 51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