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8 - 충숙왕 2

이찬조 2021. 8. 29. 09:38

고려왕조실록 108 - 충숙왕 2

- 충숙왕은 원나라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다.

 

 

충선왕이 원나라로 돌아가자 충숙왕은 비로소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처음부터 원나라의 강압적인 지시가 떨어집니다. 1315년 정월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고려의 귀족과 천민들의 복색을 강제로 제정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한나라의 왕이면서도 타국의 지시에 따라 정치를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충숙왕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입는 옷마저도 간섭을 받아야 했으니 말입니다.

 

충숙왕은 즉위한 해인 1313년 8월 임오일 익성군 홍규의 딸을 공원왕후로 맞아 들이게 되는데 1315년 1월 정묘일에 후일 제28대 왕 충혜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왕자 정이 출생하는 경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충숙왕은 이듬해 1316년 2월 원나라를 방문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전왕들이 그러했듯이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을 청해 놓았는데, 마침내 원나라 왕이 이를 허락하여 신부를 맞이하러 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충숙왕이 신부로 맞이한 여인은 원나라 영왕 야선첩목아의 딸인 복국장 공주였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앞서 충선왕은 원나라 왕에게 제의하여 세자 왕고에게 심양왕 자리를 물려 준 바가 있었습니다. 왕고가 고려의 세자라는 신분에 더해 심양왕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은 충선왕의 총애는 물론이거니와 원나라 왕실의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왕고의 세력 확대는 충숙왕에게는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충선왕이 그를 세자로 책봉하는 바람에 왕권을 지켜가는 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에게 날개 하나를 더 달아 준 격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기실 이때부터 왕고는 본격적으로 충숙왕의 자리를 호시탐탐 엿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국면에서 보면 충숙왕의 이번 원나라 방문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원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함으로서 왕고에게 맞설만한 힘을 자신도 갖추게 될 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숙왕은 대결보다는 타협이 상책이라는 판단 하에 왕고의 형 왕유를 단양부원대군으로 동생 왕훈을 연덕부원대군으로 봉합니다. 이를 통해 충숙왕이 먼저 왕고에게 타협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충숙왕의 이러한 조치는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위태로움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고려의 백성들은 원나라에서 시시때때로 요구해오는 무리한 공물과 공녀 등으로 잔뜩 위축 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왕실이나 권세가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공원왕후 홍씨는 복국장 공주가 오기 전까지는 충숙왕의 사랑 속에 만백성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의 공주가 궁에

나타나면서 그녀의 삶은 처절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왕자 정을 생산한 고려 왕실의 떳떳한 국모였건만 복국장 공주의 위세에 눌려 사가로 쫓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비단 공원왕후 홍씨만의 불행은 아니었습니다. 사랑을 잃은 충숙왕에게는 방탕과 폐위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복국장 공주 자신에게는 의문의 죽음이라는 불길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원왕후를 잊을 수 없었던 충숙왕은 때때로 미행으로 홍씨를 만나곤 하였으며 농사철을 맞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함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사냥을 하러 떠나곤 하였습니다. 사냥터 인근 10리는 농사를 하지 못하게 하고 농민들을 몰이군으로 동원하니 왕이 사냥터로 나가면 그 일대는 폐해가 상당히 컸던 것입니다.

 

지아비의 미행과 사냥 행각을 바라보면서 복국장 공주도 장님이 아닌 이상 공원왕후 홍씨에 대한 충숙왕의 애틋한 사랑을 짐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복국장 공주는 공원왕후를 극도로 증오하였고 그러한 증오심과 질투는 충숙왕으로 하여금 더욱 공주를 멀리하게 하는 악순환의 연결이었습니다. 공주가 투기할 때마다 충숙왕은 광인처럼 행동하였으며 후일 복국장 공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 원나라에서 조사차 온 사신들에게 궁중요리사 한만복 등이 자백한 말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주가 질투하자 충숙왕이 그녀를 심하게 구타하였다고 자백을 했으니 말입니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결국 원나라 왕의 입조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끌려 가는데 이때가 1321년 3월이었습니다.

원나라로 간 충숙왕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자 허유전과 먼지 등이 원나라에 가서 충숙왕의 귀국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왕고와 그 세력들이 방해 공작을 하는 바람에 귀국을 하지 못하고  3년간을 원나라에 붙잡혀있게 됩니다.

 

이기간 동안 왕고 일당은 충숙왕을 폐위시키고 왕고를 고려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중신들이 왕고의 사주를 받고 왕의 교체를 요청하는 연명부를 만들어 원나라에 보내려고까지 하였으나,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