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7 - 충숙왕 1

이찬조 2021. 8. 29. 09:37

고려왕조실록 107 - 충숙왕 1

- 충숙왕의 즉위 그러나 상왕에 눌리다.

 

 

몸에 익은 원나라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누리는 각종 특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전지(傳指)라는 기이한 형태로 나라를 다스리던 충선왕이 고려로 돌아가라는 원나라의 강권을 견디다 못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 버리니 이가 곧 고려 27대왕인 충숙왕입니다.

 

충숙왕의 이름은 도, 자는 의효, 몽고 이름은 아라눅특실리였습니다. 충선왕과 몽고 여인 야속진 사이에서 1294년 7월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 5세에 강릉군 승선사가 되었고, 장성하자 강릉대군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충숙왕 역시 부친 충선왕과 함께 원나라에가 있었기 때문에 부왕과 마찬가지로 고려보다는 원나라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충숙왕에게는 동복형 세자 감이 있었는데 부친 충선왕의 지시에 의해 충선왕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어 버렸는데, 이는 전지라는 파행적인 형태로 나라를 다스림으로서 여러 방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대신들 사이에서 세자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인 것이 살해의 직접 원인이었습니다. 본인은 정사를 등한시해도 아들한테는 왕권을 넘겨주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정사를 팽개칠 정도로 원나라가 좋았다면 차라리 세자 감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편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위에 오른 충숙왕이 펼친 미숙한 정치가 고려사회를 극심한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비록 원나라의 속국 신세지만 세자 감이 왕위를 이었다면 보다 편안한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금할 바가 없습니다.

 

어릴 때는 상당히 총명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백성의 살림까지 걱정하던 충선왕이 어찌하여 원나라에만 고집스럽게 머무르며 고려의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충선왕은 자신의 정치뿐만이 아니라 아들 충숙왕의 정치마저 돌이킬 수없는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충선왕은 도대체 어찌하려고 이복형의 아들 왕고를 세자로 책봉하여 향후 펼쳐 질 처절한 왕위 쟁탈전의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말인가.

 

이는 충선왕의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이런 일련의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원의 속국이라는 억압적 상황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곧 폐위되고 마는 현실을 뼈저리게 지켜보면서 충선왕은 차라리 어머니의 나라 원나라에서의 편안한 삶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님 계국대장 공주가 여기에서 그냥 계속 살자고 꼬득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는 원나라에서의 생활을 지켜가기 위해 그때그때 형편이 닿는 데로 일을 처리하였으며, 그러다 보니 아들 충숙왕이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악연의 고리를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충숙왕이 즉위식을 치르고자 고려로 돌아가려할 때도 충선왕은 원나라에 그대로 머무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강제로 출국시키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충숙왕과 함께 고려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충숙왕이 즉위하여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나 상왕이 건재하고 상왕의 심복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충숙왕은 뭐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각지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심복들이 상왕에게 먼저 보고하고 결재를 받으니 뭔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았지만 그러한 상황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충선왕은 승려 2000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2000개의 연등을 5일간 계속하는 등 마음대로 국사를 처리하더니, 더 나아가 중과 사찰 관련자들 108만 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108만개의 등에 불을 켤 것을 명하였으니 이를 만승회라 불렀는데 그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국고를 탕진 해가며 상왕 노릇을 톡톡히 하던 충선왕은 이듬해 정월 갑진일에 자신의 공덕 10여 조목을 손수 기록하여 식목도감에 보내고는 그들로 하여금 전문을 올려 축하하도록 명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본인의 표창장을 자기 쫄병들에게 만들도록 하여 본인 스스로 받는 꼴이었습니다. 사실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 온 뒤로도 속히 원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원나라 왕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며 허락하여 줄 것을 요청한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원나라의 신임이 멀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충선왕은 급기야 스스로의 업적을 적어 원나라에 알림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 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업적은 불교를 널리 포교하고 이를 유지하였기에 나라가 태평성대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자신의 업적을 원나라에 알리기 위해 국고야 탕진이 되든 말든 108만 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108만개의 등을 켜도록 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정성을 원나라에서 기특하게 여긴 탓일까. 마침내 충선왕은 원나라로부터 입국 許可(허가)가 떨어져 충선왕은 元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