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덕률풍이란?

이찬조 2014. 8. 4. 10:52

덕률풍(德律風)

 

 

덕률풍(德律風)1896년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으로 개통됐다.

네모반듯한 나무갑 위에 백통빛 쇠종 두개가 얹힌(영상섭 소설 '전화기' 표현) 이 신통한 기계를 당시 사람들은 전화기를 다리풍(爹釐風)덕률풍(德律風)득률풍(得律風) 등으로 불렀고,‘텔레폰(Telephone)'의 중국식 음역(音譯)이었다. 또 의역(意譯)으로 어화통(語話筒)전어통(傳語筒)전어기(傳語機)라 불리기도 했다.

중국어로 읽으면 떨뤼풍으로 발음되는데 이는 아마도 영어의 텔레폰의 발음 그대로 수용하여 발음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조선말 궁중에 고종 황제 전용의 전화기 3대를 놓고 1대는 정부 각 부처와, 1대는 평양과, 1대는 인천으로 연결했다고 한다.

당시 고종께서 친히 전화를 걸면 관리들은 의관을 바로하고, 큰 절을 네 번 한 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옥음을 받들어야 했다고 하니...

 

현재 우리나라 인구 5천만으로 보고 보급률 80%만 계산해도 4천만대 불과 100여년 전의 3대가 이토록 변할 줄은...

60년대 국제 전화 한 통화 하려면 광화문에 있던 국제전신전화국에 신청 후 15일 만에 순번 돌아오던 시절...

신규 전화 신청을 하면 2년 반 만에 설치되었던 그날의 기쁨...

 

오늘날의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골동품이겠지만..

이 모든 것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 전화의 역사..

  초창기의 전화는 감도가 매우 나빴다. 그 소리가 마치 귀뚜라미 우는 소리 같아 나이 든 사람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화가 걸려오면 주위에 있는 관원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있거나 통화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아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다. 전화기를 만드는 기술 자체도 유치했을 뿐 아니라, 전화선이 동선 아닌 철선인데다 전신까지 같이 썼기에 잡음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전화를 거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장거리전화를 단 회사는 인천에 있는 세창양행(世昌洋行)이었다. 세창양행은 인천에 있는 본사와 강원도 금성(지금의 김화) 당현금광과 통화하기 위해 전선을 가설해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청했다.

  세창양행은 독일인 마이어가 설립한,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였다. 그 회사가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홍콩과 상하이톈진고베 등지에 지사를 설립했는데, 제물포(인천)에 설립한 지사 이름이 세창양행이었다. 세창양행은 당시 우리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손잡고 무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홍삼과 귀금속을 수출하고 면직물과 바늘석유자전거금계랍 등 당시로서는 값진 박래품(舶來品)을 수입했다. 상선도 운행하고 광산도 개발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낸 회사여서 당시엔 일반인에게도 꽤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7500원이라는, 적잖은 비용을 들여 가설한 전화는 별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말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통화 상태가 나쁘자 세창양행은 5개월간의 전화세로 250원을 납부하고 전화시설을 자진 철거했다. 1899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