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40) 군사 범증(范增)
항우는 회계성에 도착한 뒤 우영, 환초, 우자기, 영포 등 네 장수를 항량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였다.
항량은 네 장수에게 환영연을 성대하게 베풀어 주며 말했다.
"천군을 얻기는 쉬워도 쓸만한 장수 한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그대들 네 장수를 한꺼번에 얻게 되었으니 이런 기쁨이 어디 있겠소. 이제 우리 군사가 20만에 가까웠으니, 진나라를 쳐부수기에 충분할 것 같소이다. 일간 군사를 일으켜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하겠소?"
항우가 즉석에서 대답한다.
"좋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저희들은 언제든지 함양으로 쳐들어가겠습니다. 우리 군사가 물경 20만에 이르렀으니, 썩어빠진 진나라 군사가 백만이기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후 항량이 진나라를 치려고 대군을 모두 거느리고 회계 땅을 떠나려고 하자 백성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저희들은 오랫동안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려 오다가 성주님의 덕택으로 이제야 겨우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주님께서 저희들을 버리고 떠나가시면, 저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주님께서 이곳을 떠나시려거든 차라리 저희들을 죽이고 떠나시옵소서."
항량은 백성들의 호소에 크게 감동하였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로서니 어찌 그대들을 버리겠소. 나는 진나라를 쳐서 만천하의 백성들을 한결같이 구해 주려는 것이니, 금후의 일은 조금도 걱정 마시오. 천하를 평정하고 나면 회계 고을에는 특별히 덕망 높은 태수(太守)를 보내 줄 것이고, 이 고을 백성들만은 10년 동안 모든 조세(組稅)를 면제해 줄 것이오. 그러니 이만 들어가시오."
이렇게 항량은 백성들을 가까스로 달래 주고 정도(征途)에 오르는데, 그 위용(威容)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부터는 대군을 거느리고 강동(江東)을 거쳐 진나라 도읍인 함양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회양(淮陽) 땅에 이르자, 대장 계포(季布)가 항량에게 아뢴다.
"저희 군에는 항우 장군을 비롯하여 실전에 능한 맹장들이 여러 분 계시오나, 정작 군사(軍師)의 역활을 맡아 주실 어른은 한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다행히 여기서 멀지 않은 산중에 범증(范增)이라는
지사(志士) 한 분이 계시오니, 그분을 우리들의 군사로 모셔 오면 어떻겠습니까?"
항량이 대답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기어이 군사로 모셔 오고 싶소이다. 그 분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범증은 70을 넘은 노인이기는 하오나, 그의 지모(智謨)는 옛날의 손자(孫子)나 오자(吳子)를 능가하는 어른이시옵니다. 그분을 군사로 모셔 오게 되면, 우리는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항량이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회양 땅에 <범증>이라는 고사(高士)가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소.
때마침 좋은 기회이니, 계포 장군은 폐백(幣帛)을 갖춰 가지고 그분을 군사로 모셔 오도록 하시오."
계포는 즉시 폐백을 마련해 가지고 범증이 숨어 산다는 기고산(旗鼓山)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워낙 험한 산중이어서 범증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무꾼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그 어른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 여기서도 30리쯤 떨어진 토굴 속에 살고 계시지요. 설혹 찾아 가시더라도 만나 주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포가 다시 30리쯤 산속으로 찾아 들어가니, 어느 토굴 속에서 거문고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옳다! 범증 선생이 저 토굴 속에 계시는 것이 분명하구나!)
이윽고 계포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토굴 안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첫눈에 보아도 고귀한 기품이 범증 선생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계포가 인기척을 해 보니, 백발의 노인은 거문고를 뜯던 손을 멈추고 계포를 쳐다보며 조용히 묻는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 산중에 들어 왔는고?"
계포는 다짜고짜 범증에게 큰절을 올리고, 폐백을 조심스럽게 내놓으며 말했다.
"소생은 초국 대장 항량 장군의 휘하에 있는 계포라는 장수이옵니다. 지금 진나라의 학정이 무도한 관계로 항량 장군께서는 진나라를 평정하여 백성들을 구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사옵기에 선생을 군사로 모셔 가고 싶어서 찾아왔사옵니다."
"나 같은 쓸모없는 늙은이를 군사로 데려가겠다고 ? 하하하."
범증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고 나서,
"항량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묻는다.
"항량 장군은 일찍이 초나라의 명장이셨던 향연 장군의 아드님이시옵니다."
"음 ...초나라의 명장이었던 향연 장군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던가? 이러나 저러나 나 같은 늙은이를 데려가 보았자 쓸모가 없을 것 같으니 이 폐백일랑 가지고 그냥 돌아가게!"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는 것이었다.
계포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설득한다.
"지금 천하가 너무나도 어지럽사와,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가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쳐 없애야 할 형편이옵니다. 하물며 선생께서는 손, 오(孫,吳)를 능가하는 지략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춘추도 이미 70이 넘으셨으므로, 제세구민(濟世救民)을 위해 마지막 봉공(奉公)을 하셔야 할 때인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 옛날 강태공(姜太公)이 문왕(文王)을 만나 세상을 구제한 고사(故事)도 있사오니, 선생께서는 사양치 마시옵고 항량 장군을 도와주시옵소서."
범증은 계포의 간곡한 설득에 감명을 받은 듯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며 말한다.
"나 역시 진황(秦皇)의 잔혹한 학정에는 분개를 금치 못해 누군가가 세상을 바로잡아 줄 인물이 없을까 하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네. 자네가 항량 장군의 명을 받고 나를 데리러 왔다니 나도 자네를 따라 나설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세상만사에는 <천수(天數)>라는 것이 있는 법이야. 내가 자네를 따라 갈 것인가의 여부는 오늘 밤 천수를 점쳐 보아서 내일 아침에 결정할 테니, 이 폐백은 내일 아침까지 보류해 두게나."
그러나 계포는 폐백을 범증의 품에 억지로 안겨 주면서 간곡하게 애원했다.
"선생님께서 오늘 밤에 천수를 점쳐 보시고, 내일 아침에 마음이 달라지실지도 모르오니 저희들의 성의는 지금 당장 받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범증은 마지못해 폐백을 받으며 말했다.
"그대가 의(義)를 위해 이처럼 열성적으로 권고하니, 나도 인정상 거절할 수가 없네 그려. 그러면 내일 아침에 자네와 산을 내려가기로 하세."
이날 밤 범증은 밤이 깊기를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천수를 점쳐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장탄식(長歎息)을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아, 항량은 천하의 주인이 될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그를 따라가기로 약속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었구나. 그러나 장부의 일언은 중천금(重千金)이니, 폐백까지 받은 이상 이제는 어쩔 수가 없으니 항량을 돕기로 해야 하겠다")
다음날 범증은 계포의 인도로 항량의 진지로 찾아오니, 항량은 진문(陣門) 밖까지 영접을 나와 범증을 상좌에 모시며 말했다.
"선생께서 우리들을 위해 이처럼 하산해 주시니 고맙기 한량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오늘부터는 군사로서 많은 도움을 주소서."
범증이 두 번 절하며 말한다.
"장군께서 천하를 의로써 구하시겠다고 하오니, 노구(老軀)는 왕업(王業)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사옵니다.
항량은 범증을 군사로 모신다는 명을 각 장수에게 하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한다.
"우리는 곧 강동을 거쳐 함양으로 쳐들어갈 계획인데, 선생은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범증은 한참 동안 심사숙고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전체의 판국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최근에 패현(沛縣)에서 유방이라는 사람도 봉기했다고 합니다. 또 오래 전부터 반기를 들고 일어난 진승(陳勝), 오광(吳廣)등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에 대한 정보를 시급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함양으로 쳐들어가면 될 게 아니오? 진승과 오광 등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시오?"
범증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한다.
"천하는 나 혼자만의 천하가 아니옵니다. 그들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고 함양을 공동으로 공략해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 그들이 몰락했다면, 그 원인도 충분히 분석하여서, 우리가 같은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진승, 오광등과 섣불리 연합했다가 이용만 당하고 발길에 걷어차이는 신세가 되면 어떡하지요?"
범증은 그 말을 듣고 파안일소(破顔一笑)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하하, 세상이란 결국, 먹느냐 먹히는냐의 싸움인 것이옵니다. 큰 고기는 잔고기를 잡아먹어야만 살아가게 되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잡아먹히느냐, 또는 그들이 우리에게 잡아먹히느냐 하는 문제는, 누가 큰 고기이고 작은 고기냐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인 것이옵니다.
항량은 범증의 말이 옳다고 여겨,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진승과 오광의 소식을 소상하게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진승과 오광은 어처구니없게 몰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승은 몇 개의 고을을 점령하고 나자, 스스로 초왕(楚王)을 자처하고 많은 미녀들을 거느리고 주색에 탐닉하였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등, 두 장수가 눈물을 흘려가며 간언을 하였으나, 진승은 끝내 듣지 않고 주색에 미쳐 돌아가다가, 결국에는 진장(秦將) 장한의 손에 어이없게 죽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범증은 이 소식을 듣고, 항량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진승이 어찌하여 어이없이 망해버렸는지, 그 원인을 알고 계시옵니까?"
"목전의 소욕(小慾)에 눈이 어두워, 주색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점도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항량은 얼른 알 수가 없어서 즉석에서 반문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원인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범증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진승은 대의명분을 내세울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진승도 처음에는 진나라를 징벌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력이 강해지자, 초나라의 왕손(王孫)을 왕으로 옹립할 생각은 아니 하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진승이 망하게 된 원인은 바로 그런 점에 있었던 것이옵니다."
항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소이까?"
"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진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각처에서 장수들과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든 것은, 공이 초나라의 충신이셨던 향연 장군의 후손이기 때문인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공께서도 천하의 대세를 진심으로 성취하시려면, 초나라의 왕손을 초왕으로 옹립해 놓고 활동하셔야 하옵니다.
"듣고 보니 과연 옳으신 말씀이시오. 그러나 초나라의 왕손들은 진시황의 손에 모두가 몰살을 당하고 말았는데, 어디서 그런 사람을 구해 올 수 있겠소?"
"그래도 어딘가에 한 사람쯤 남아 있을지 모르오니, 그런 사람을 반드시 찾아보셔야 합니다."
항량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대장 종이매(鍾離昧)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그대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초나라의 왕손을 한 사람 찾아오도록 하시오. 촌수(寸數)는 멀어도 상관없으니 초왕의 후예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오."
종이매는 여러 달 애를 쓴 끝에, 어느 바닷가에서 비루하게 살고 있던 초왕의 왕족이라는 23세 된 청년 하나를 찾아서 데리고 왔다.
이름이 미심(米心)이라고 하는 그 청년을 보자, 항량과 범증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 청년을 <초회왕(楚懷王)> 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범증이 말한다.
"왕을 새로 모셨으니, 이제는 조정의 기틀도 제대로 갖추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량은 국가의 진용을 다음과 같이 편성, 임명하였다.
초회왕 (楚懷王) ... 미심 (米心)
무신군 (武信君) ... 항량 (項梁)
대사마부장군 (大司馬副將軍) ... 항우 (項羽)
군사 (軍師) ... 범증 (范增)
군기장군 (軍騎將軍) ... 계포 (系布)
同 ... 종이매 (鍾離昧)
편장군 (偏將軍) ... 영포 (英布)
산기장군 (散騎將軍) ... 환초 (桓楚)
同 ... 우영 (于英)
同 ... 우자기(虞子期)
이상과 같이 초국 진용이 확립되었음을 세상에 널리 공포하니, 그 옛날 초국 백성들은 저마다 새로운 정부에 가담하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렇게 군사 범증의 지혜로 일약 초국의 기틀이 확고하게 잡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얼마 후, 초군이 함양으로 출격(出擊)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난데없는 늙은 장수가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초군 진영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산기 장군 환초가 말을 타고 달려나가며,
"그대는 누구관데, 남의 영내에 함부로 들어오는가! 그 자리에 정지하고 이름을 밝히라! " 하고 외쳐 대었다.
그러자 늙은 장수는 그 자리에 말을 멈추더니,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나는 옛날 초국 대장이었던 송의(宋義)라는 늙은이요. 나는 그동안 초국을 재건하려고 3만여 명의 군사를 길러 오고 있는 중인데, 항량 장군이 초왕을 새로 옹립하고 함양으로 쳐들어간다고 하기에, 나도 힘을 보태고자 군사를 이끌고 찾아오는 길이오."
항량은 그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송의를 영내로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장군이 데리고 오신 군사는 특별히 <경자 관군(卿子冠軍)> 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송의가 항량에게 건의한다.
"이곳을 도읍(都邑)으로 정하시기에는 땅이 너무 협소합니다. 여기서 백 리쯤 떨어진 우소(旴昭)라는 곳에는 초나라 시절에 대장을 지낸 <진영>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으니, 진영 장군과 상의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심이 어떠하겠나이까?"
"진영 장군은 나도 면식이 있는 분이니, 그 분과 제휴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소이다.
그러나 <우소>라는 곳이 과연 우리 재건(再建) 초국의 도읍으로 적당한 곳일까요?"
"우소는 지형적으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항량과 항우, 범증은 송의의 말을 옳게 여겨 대군을 우소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얼마를 행군하다 보니, 저 멀리서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많은 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웬 군사들이냐! 내가 직접 나가 알아보리라."
군사 범증이 말을 달려 나가 알아보니, 창검을 번득이며 달려온 수만 군사들 선두에는 미목(眉目)이 수려한 장수 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귀장(貴將)은 뉘시오. 성명을 밝히시오."
그 장수는 범증 앞으로 한걸음 나오면서 대답한다.
"나는 패현에 있는 유방(劉邦)이라는 사람이오. 항량 장군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친다고 하기에, 나도 초군을 돕고자 하후영(夏侯英), 번쾌 등의 장수와 함께 10만 군사를 이끌고 왔소이다."
"옛! 유방 장군? "
범증은 깜짝 놀라며 유방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살펴보니, 그의 얼굴에는 제왕의 기상(帝王之氣象)이 넘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범증은 자기도 모르게,
(앗차! 나는 주인으로 모셔야 할 사람을 잘못 선택했구나!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고 내심으로 뉘우침을 마지않았다.
범증이 유방을 데리고 진영으로 돌아와 항량에게 인사를 시키니 항량은 크게 기뻐하면서 유방에게 말한다.
"유방 장군이 나를 돕기 위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오셨다니 이처럼 고마운 일이 없구려. 이제 우리들 모두가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쳐 없애고 초나라를 세우기로 합시다."
그렇게 도착한 우소에서 항량은 유방, 진영과 함께 함양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서둘러 갖추고 있었다.
그 무렵에 회음(淮陰)땅에 산다는 한신(韓信)이라는 젊은이가 항량을 찾아와서,
"함양으로 쳐들어가려면 많은 장수가 필요하실텐데, 저도 병학(兵學)을 연구하는 사람이니, 나를 장수로 기용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하고 장수가 되기를 자원하고 나왔다.
항량이 보아하니, 한신은 풍채가 초라하여 장수의 재목이 되어 보이지 않았다.
"자네처럼 볼품없이 초라한 위인이 무슨 장수가 되겠다는 말인가?"
항량이 일언지하에 퇴짜를 놓아 버리자, 범증이 얼른 달려와 항량에게 귀뜸을 해 주었다.
"저 사람은 행색은 초라하지만, 관상학상으로 보아 장차 큰 인물이 될 상(相) 입니다. 그대로 쫒아 버리면 후일에 화를 입게 될지 모르니, 장군으로 기용하여 붙잡아 두도록 하시옵소서."
"에이 여보시오. 저런 볼품없는 위인을 무엇에 쓰려고 장군으로 기용하란 말씀이오?"
"그런게아니옵니다. 저 사람을 그냥 쫒아 버렸다가는 후일에 반드시 후회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어떤 명목으로든지 붙잡아 두셔야 합니다."
"군사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저런 사람을 장군으로 쓸 수는 없소이다. 군사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집극 낭관(執戟郎官 : 요즘으로치면 소위, 중위, 대위급)>으로나 쓰기로 하지요."
군사 범증은 항량의 앞을 물러나오며 혼자 개탄해 마지않았다.
(아아, 무신군(武信君: 항량)은 사람을 이렇게나 몰라보고 있으니, 이런 사람이 어찌 대업을 제대로 성취시킬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한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한신은 회음(淮陰)에 몹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는 거지노릇까지 하였고, 성장해서도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 지금도 바닷가에서 고기를 낚아 팔아먹고 살아오는 궁핍한 처지였다.
그러면서도 포부만은 거창하기 이를데가 없어서,
(사내 대장부로 태어난 이상 나도 언젠가는 남들처럼 천하를 호령하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고, 자나깨나 언제나 장검(長劍)을 허리에 차고 다녔고 틈만 있으면 무예를 연습하고 병서를 열심히 탐독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장장 10여 년, 이제는 무인(武人)으로서는 자신이 생겼지만 생활이 가난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신이 어느 날 개울가를 지나는데 빨래를 하던 아낙네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신은 하얀 쌀밥을 보자 하도 먹고 싶어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침을 삼키며 아낙네의 숟가락이 오르내리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밥을 먹던 아낙네는 그 모양이 무척 측은하게 여겨져서,
"배가 몹시 고픈 모양이니 먹다 남은 밥이라도 먹고 가거라."
하고 말하며 반 사발쯤 되는 찬밥을 한신에게 내밀어 주었다.
한신은 아낙이 주는 찬밥을 게눈감추듯 단숨에 먹어치우고, 아낙에게 빈 그릇을 돌려주며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이렇게 말했다.
"후일 제가 출세를 하면 오늘의 은혜는 반드시 갚아 드리겠습니다."
아낙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발칵 내며 한신을 호되게 꾸짖었다.
"사내자식이 되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냐! 나는 네가 하도 불쌍해서 밥을 나눠 줬을 뿐이지 은혜를 갚으라고 준 것은 아니다!"
한신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한신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팔려고 장거리로 들고 나갔다. 그러자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한신이 허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보고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이 자식아! 너는 허리에 검을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천하에 못나 보이는 놈이다. 네가 용기가 있거든 그 검으로 나를 한 번 찔러 보거라. 나를 한 번 찔러 봐 ...! "
한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더욱 신바람을 내면서,
"나를 찌를 용기가 없거든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신은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땅바닥을 기어 그 소년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나왔다.
그 광경을 보자 구경꾼들조차,
"허리에 장검을 차고만 다녔지 너야말로 천하의 졸장부요 용기도 없는 겁장이로구나! "
하고 한신을 크게 조롱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이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던 허부(許負)라는 노인만은 한신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 주면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네가 지금 비록 겁쟁이라고 조롱을 당하고 있지만, 관상학상으로 보면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이로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꾸준히 참아가면서 자중하거라. 그러면 너에게도 때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자 한신은 싱긋 웃고 돌아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은 몇해 후 초군이 함양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신은 항량을 찾아와 장군으로 기용해 줄 것을 자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항량은 한신의 겉모습만 보고, 겨우 <집극 낭관>으로 썼을 뿐인데, 바로 이 사람 한신이야말로 후일 유방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게 되는 명장이었던 것이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40) 군사 범증(范增) |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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