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42) 항우의 패기

이찬조 2020. 1. 26. 05:51

열국지 (42) 항우의 패기

 

진나라 대장군 장한은 백전불굴의 명장이었다.

그는 기사회생(起死回生)으로 초군을 대파하고 나자, 즉시 군사를 돌려 조나라 땅에서 준동하고 있는 또 다른 의병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조나라 땅에서는 장이(張耳), 진여(陳餘)등의 의사들이 조왕 헐(歇)을 받들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왕 헐은 진군이 쳐들어오자 장이, 진여 등으로 하여금 진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조군은 진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왕은 마침내 거록성(鉅鹿城)으로 도망을 쳐서 항우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급서를 보내었다.

진류에 머물러 있던 항우는 급보를 받아 보고 범증, 송의 장군과 상의 한다.

"우리는 지금 상(喪)을 당하여 싸울 경황이 없는데 조왕이 구원병을 요청해 왔으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남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지금 우소에 계시는 대왕께서도 진군의 공격을 당할 우려도 있지 아니하오? 그러하니 우리는 우소로 달려가서 대왕을 수호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구려."

범증이 그 말을 듣고 말한다.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우소는 지리적으로 진군에게 공격을 당하기 쉬운 곳이니 우리는 이 기회에 도읍을 팽성(彭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말씀에 나도 동감이오. 대왕의 윤허를 얻어 도읍을 옮기기로 합시다."

항우는 군사를 거느리고 우소로 달려와 회왕에게 무신군의 전사 사실부터 보고하였다.

그러자 회왕은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목을 놓아 울기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항우는 오히려 회왕을 위로하며 품한다.

"우리 군사들은 무신군의 전사로 사기가 몹시 침체해 있는 형편이온데, 진군은 조군을 치고 나서 우리에게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므로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 놓고 후일을 기함이 좋을 것 같사오니, 대왕께서는 천도(遷都)를 윤허해 주시옵소서."

"여러분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과인이 어찌 그것을 마다고 하겠소."

이렇게 되어 팽성으로 천도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또다시 조왕으로 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급사가 달려왔다.

"우리는 진군에게 한 달이 넘도록 포위되어 있어서, 군량이 떨어져 군사가 떼죽음을 당하고 있는 중이오니, 대왕께서는 저희들에게 시급히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려운 절박한 사정의 급서(急書)를 보내왔다.

회왕은 어떡하든지 조왕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항우, 송의, 범증 등 최고위 인사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상의한다.

"지금 진군에게 포위당한 조군을 꼭 도와주고 싶은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항우와 범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지금 저희들은 남을 도와줄 형편은 아니오나 대왕께서 기어이 도와주라는 명령을 내리시면 저희들은 출전할 것이옵니다."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아오. 그러나 조국과의 신뢰도 있으니 지금 당장 군사를 파견하여 조군을 도와주기로 합시다. 송의 장군은 총사령관이 되고, 항우 장군은 부장(副將)이 되어, 범증 군사와 함께 출전하면 진군을 무난히 격파할 수가 있을 것이오."

항우를 제쳐놓고 송의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니, 송의는 항우보다 나이도 많았거니와 <경자 관군>이라는 별동 부대의 총대장이었던 관계로 대접을 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세 장수는 조군을 돕기 위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즉시 출동하여 안양(安陽)이라는 곳에 진을 쳤다.

그런데 송의는 일단 진을 치고 난뒤 무슨 까닭인지 며칠이 지나도 싸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항우는 의아하여 송의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와 가지고 어찌하여 진군과 싸울 생각을 아니 하시오?"

그러자 송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진군은 조군을 포위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지쳐 버려서 싸울 기력이 없는 형편이오. 그러므로 저들이 기진맥진해졌을 때를 기다려 단 한 판의 싸움으로 장한을 생포해 버릴 계획이오."

송의는 이렇게 말을 해 놓고도 보름이 다 되도록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동한 항우가 송의에게 따지고 들었다.

"조군이 성안에 갇혀서 굶어 죽어 가는 판인데 그들을 도와주러 온 우리가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작정이오? 우리가 밖에서 공격하고 조군이 안에서 호응하면, 진군을 간단히 격파할 수가 있는데 어찌하여 허송세월만 하고 있느냐 말이오."

송의가 대답한다.

"급히 먹는 밥에 목이 멘다고 했소. 장군은 어찌하여 이처럼 서두르시오. 싸움에는 장군이 나보다 나을지 몰라도 지략에 있어서는 장군이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오. 싸우지도 않고서 승리할 수 있는 계략이 있는데, 장군은 어찌하여 굳이 피를 흘리자고 덤비느냐 말이오."

그리고 나서 삼군에게,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허락이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하는 엄명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무렵 항우는 송의의 놀라운 비밀 하나를 알아내었다.

그것은 송의가 맏아들인 송양(宋襄)을 제(齊)나라에 밀파하여 재상(宰相)을 시키려고 비밀공작을 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항우는 송의가 모반자(謀叛者)임을 알고 모골이 송연하였다.

(송의가 제왕(齊王)과 제휴하여 초군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런 반역자는 살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항우가 단신으로 송의를 급습하여, 때마침 미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송의의 목을 한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경자 관군>에 속한 모든 장졸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송의를 죽인 사유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대들의 주인은 이미 죽어 없어졌으니, 그대들은 장차 어찌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우리에게 힘을 합치겠다는 자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면 지체 없이 이곳을 떠나더라도 잡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경자 관군 장수들은 입을 모아 대답한다.

"주공으로 모시던 송의 장군이 반역을 도모했다니, 그의 부하였던 저희들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옵니다. 진나라를 없애 버리고 새나라를 건설할 군사는 역시 초군밖에 없으니, 저희들은 다같이 장군님의 힘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이렇게 송의가 거느리고 있던 3만여 명의 <경자 관군>은 고스란히 초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항우는 부장(副將) 환초(桓楚)를 회왕에게 보내어 모든 사실을 보고하니, 회왕은 크게 놀라고 크게 기뻐하며 종이매(鍾離昧)를 특사로 보내 항우를 대장군에 봉하는 동시에 진군을 속히 쳐서 조군을 구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항우는 영포를 선봉장으로 삼아, 정병 2만을 주면서 강을 건너 진군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영포가 강을 건너려 하자 장한이 초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사마흔과 동예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강가에서 도강(渡江)하는 초군을 막아내라고 명했다.

적을 눈앞에 두고 강을 건너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그러기에 영포는 강 건너 적진을 바라보며 항우에게 묻는다.

"적전 도강(敵前渡江)은 아군에게 피해가 막심할 것 같으니, 다른 작전을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항우는 영포에게 무엇인가 속삭이고 나서,

"작전도 하나의 사술(詐術)이니, 다소간 피해를 보더라도 오늘 밤 축시(丑時)를 기해 도강을 감행하도록 하오. 그래야만 적의 선봉 부대를 내일 아침에 괴멸 시킬 수 있을 것이오."

하고 웃으며 말하였다.

이날 밤 축시를 기하여 영포의 2만 군사는 암흑을 뚫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진군은 초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려고 어둠 속에서 화살을 빗발치듯 퍼부었다. 그러나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인데다가 영포는 강 언저리에서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진군의 화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 진군의 저항이 주춤하는 사이에 초군이 강을 건너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5만에 달하는 진초 양군(秦楚兩軍)은 일대혼전을 벌였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워, 덮어놓고 찌르고 베는 무서운 혼전이었다.

그런데 날이 훤히 밝아 올 무렵이 되었을 때, 홀연 진군의 배후(背後)로 부터 3만여 명의 대군이 홀연히 나타나 진군을 마치 풀이라도 베듯이 모조리 때려눕히는 장수가 있었다.

진장 사마흔과 동예가 소스라치게 놀라 살펴보니, 진군 속에서 질풍처럼 휩쓸고 돌아가는 장수는 다름 아닌 항우가 아닌가.

"앗 ! 항우다 .... ! "

사마흔과 동예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머리를 돌려 진군에게 외쳤다.

"항우가 왔다! 모두들 후퇴하라! "

그러나 진군은 후퇴할 퇴로를 이미 항우에게 차단 당한데다가 앞에서는 영포의 군사가 휘몰아쳐 와서 진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죽었다. 사마흔과 동예가 가까스로 도망을 쳐서 하북 진지(河北陳地)로 달려와 보니, 그곳은 이미 항우의 군사에게 점령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항우가 어느 틈에 .... ! "

사마흔과 동예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면 항우는 어느 틈에 강을 건너와 진군 후방의 진지를 이처럼 쉽게 점령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항우는 영포에게 도강 명령을 내린 뒤에, 영포군이 도강을 시도하던 암흑같은 어둠 속에서 3만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방비가 소홀한 상류(上流)로 올라가 강을 쉽게 건넜다. 그리하여 경비가 소홀한 적의 하북 진지를 한밤중에 점령해 버리고 다시 도강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강변으로 달려가, 사마흔과 동예의 군사를 배후로부터 협공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항우는 적의 허(虛)를 찌르는 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전후방 진지를 모조리 격파해 버린 것이었다. 그로인해 군량과 무기도 어마어마하게 노획하였다.

항우는 적진 점령이 마무리 되자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적이 다시 준동하지 못하도록 선박(船舶)과 막사(幕舍)등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이제부터 사흘 안에 장한의 군사까지 모조리 없앨 것이니, 군량도 사흘분만 남겨 놓고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이런 명령을 받고 영포가 반문한다.

"장군 ! 군량까지 사흘분만 남겨 두고, 불태워 버리란 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진군은 장거리 주둔에 지쳐 있기 때문에 넉넉잡고 사흘이면 우리가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 불필요한 군량을 끌고 다니는 부담도 줄이고 장한의 진지를 점령해 버리면 거기서도 군량을 노획할 수가 있으니 굳이 무거운 군량의 운송과 보관에 많은 인력을 쓸 이유가 없지 않은가. "

모든 병사는 그 말을 듣고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다.

그러나 군사 범증만은 항우의 명령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흘분의 군량만을 남겨 두고 나머지 쌀을 모두 불살라 버리라는 항우의 명령은 너무도 우직(愚直)한 명령으로 본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항우의 불퇴전(不退轉)의 결의와 약동하는 패기(覇氣)를 엿볼 수 있는 상황이긴 하였다.

또 어쩌면 항우는 모든 장병들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인생의 다양한 경험이 풍부한 노장 범증의 눈에는 우자(愚者)의 오기(傲氣)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항우의 말대로 사흘 안에 완승(完勝)을 거두더라도 일년을 공들여야 수확할 수 있는 귀중한 쌀을 무엇 때문에 불태워 버린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항우의 호언(豪言)대로 사흘 안에 끝내야 할 전쟁이 그 이싱 오래 계속된다면 그때의 군량미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싸우려면 먹어야한다. 싸우지 않을 수는 있어서 먹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범증이 항우의 명령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그러나 최고 사령관의 명령을 맞대 놓고 비난할 수는 없어, 범증은 종이매 장군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항우 장군이 진군을 사흘 안에 섬멸시킬 결심에서 노획한 선박과 장비를 모두 파괴해 버리고 군량미조차도 사흘분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했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군량미까지 불태워 없애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처사라고 생각 되는데, 장군의 생각은 어떠하오?"

종이매가 대답한다.

"그것은 장병들의 사기를 돋아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 장병들의 사기가 크게 오른 것은 사실입니다."

범증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말한다.

"물론 나도 항우 장군의 그러한 계략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전쟁이란 반드시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않소. 만약에 전쟁이 사흘 안에 끝나지 않고 그 이상 오래 끌게 된다면 군량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오?"

종이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군사의 말씀을 들어 보니, 그때에는 군량미 기근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겠군요."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오. 설령 사흘 안에 결판이 난다 하여도, 군량미만은 그 이상의 대비가 필요한 법이오. 그러니 장군은 항우 장군 모르게 소량의 남은 군량만을 태우는 모양을 보이고 넉넉한 군량을 하남 (河南)으로 이송시켜 위급한 때에 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오."

"군사의 세밀한 지략에는 오직 감탄이 있을 뿐이옵니다. 그러면 군사의 명령대로 하남에 군량을 별도로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종이매는 크게 감탄하며 하남으로 달려가 군량미를 따로 마련해 두었다.

[출처] 열국지(熱國誌) (42) 항우의 패기.|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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