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51) 망이궁의 비극과 조고의 최후

이찬조 2020. 2. 5. 18:06

열국지 (51) 망이궁의 비극과 조고의 최후

 

무관(武關)은 함양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요새(要塞)이므로, 함양을 공략하려면 먼저 무관부터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무관은 글자 그대로 난공불락의 험난한 요새였다.

유방은 관영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무관에 총공격을 퍼부어 보았다.

그러나 지세가 워낙 험하여 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무관의 수장(守將) <주괴>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응전할 생각은 아니 하고 함양에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급히 올렸다.

<지금 유방의 대군이 몰려와 무관을 맹렬히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적의 세력이 워낙 강하여, 저로서는 성을 지켜나가기가 매우 어렵사오니, 지원군 10만을 급히 보내 주시옵소서. 만약 무관이 함락되면 함양을 수비하기도 어려울 것이니, 이 점을 참작하시어, 지원군을 속히 보내 주시옵소서.>

그 상소문은 황제에게 올린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상소문이 그러했듯이 주괴가 보낸 상소문도 승상 조고가 먼저 받아 보았다.

조고는 주괴의 상소문을 읽어 보고 크게 놀라며 긴급 안보 회의를 열었다.

"지금 무관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는데, 무관이 함락되면 함양도 무사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어 지원군 10만 명을 보낼 것이니, 누구든지 사령관으로 출전할 장수가 있으면 말해 보시오."

조고의 앞에는 수십 명의 장수들이 있었음에도, 싸우러 나가겠고 나서는 장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맹장이었던 장한조차 견디지 못하고 초군에게 항복한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에는 장수가 많기는 하였으나, 장한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계속되는 조고의 압정(壓政)으로 장수들이 전의(戰意) 상실한 탓이 가장 컷 던 것이다.

한 사람도 나서지 않자 조고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당신네들은 평소에 높은 국록을 먹어가며 온갖 호강을 다해 왔건만, 나라가 위급한 이때, 나아가 싸우기가 그렇게도 두렵단 말이오?"

하고 저도 모르게 호통을 질렀다.

그러나 장수들은 조고의 호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아니 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 무관으로부터 <지원군을 보내 주지 않으면 무관은 함락 당하게 된다>는 급보가 또다시

날아들었다.

그러나 조고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면, 황제는 승상인 나에게 책임을 추궁하게 될 것이 아닌가? 사태가 그렇게 되면 나의 목숨이 달아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조고는 소름이 끼쳤다. 그리하여 지원책을 골똘히 강구해 보다가 이런 꾀를 생각해 내었다.

(에라 모르겠다. 꾀병으로 병석에 누워 있으면 그런대로 책임을 회피할 수가 있지 않겠나.)

조고는 그날부터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 승상부에는 아예 등청을 하지 않았다.

한편, 진나라의 이세 황제는 나라에 위급지사가 생긴 줄도 모르고 날마다 미녀들과 더불어 주색만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황제는 매우 흉악스러운 꿈을 꾸게 되었다.

많은 미녀들을 거느리고 야외에서 놀이를 즐기고 있노라니까 홀연 숲속에서 백호(白虎) 한 마리가 뛰쳐 나와, 황제의 눈앞에서 그의 애마(愛馬)를 물어 죽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심사가 매우 불쾌하였다.

그리하여 복자(卜者)에게 꿈풀이를 시켰다.

점쟁이는 점을 쳐 보고 나서 대답한다.

"대궐을 수호하는 용신(龍神)께서 격노하시어, 그런 꿈을 꾸시게 되신 것이옵니다."

"용신이 격노하여 그렇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화를 면할 수가 있겠느냐?"

"대궐의 용신이 격노하셨으므로, 우선 목전이 화를 면하시려면 폐하의 거처를 망이궁(望夷宮)으로 옮기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망이궁으로 거처만 옮기면 화를 면할 수가 있겠느냐 ?"

"망이궁으로 옮겨 가신 연후에, 백마(白馬) 한 마리를 제물로 삼아 용신제(龍神祭)를 지내시옵소서. 그러면 화를 면하실 수가 있사옵니다."

황제는 점쟁이의 말대로, 그날로 거처를 망이궁으로 옮기고 백마를 잡아 용신제를 올렸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루는 시신(侍臣)들을 불러 이렇게 물어 보았다.

"얼마 전에 적도(賊徒)들이 각지에서 난동을 부린다고 들었는데, 그 후에 결과는 어찌 되었느냐?"

시신들은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을 수그린 채 눈물만 흘린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조고의 질책이 두려워 사실대로 대답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크게 의아스러워 언성을 높여 따진다.

"너희들은 왜 대답을 못 하고 울기만 하느냐. 이는 필연코 짐에게 무엇인가를 속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여라. 만약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엄중하게 처벌하리라."

시신들은 그제서야 마지못해 땅에 엎드려 울면서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사실인즉, 초나라 군사들이 동과 서로 나누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함양으로 쳐들어오고 있어서, 각 지방의 제후(諸侯)들은 저마다 나라를 배반하고 초군에게 항복을 하는 형편이옵니다. 따라서 함양도 머지않아 적에게 함락되어 버릴지도 모르옵니다."

이세 황제는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뭐야? 나라가 이 꼴이 되도록 도대체 승상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승상 조고를 당장 이 자리에 불러라! "

추상같은 칙명을 내렸다.

특사가 <급히 입궐하라>는 황명을 받들고 조고를 찾아갔다.

조고는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기동조차 제대로 못 하는 흉내를 내면서 특사에게 말한다.

"내가 중병으로 기동을 할 수가 없으니, 황제 폐하에게 입궐 못하는 사정을 상세히 여쭈어 주시오."

황제는 특사의 보고를 받고 불같이 진노한다.

"나라가 망해 가는 판인데, 승상이라는 자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입궐을 못 하겠다니, 말이 되는소리냐! 그자가 일찍이 명신(名臣) 이사(李斯)를 모함으로 살해해 버린 것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 되었으니, 조고를 마땅히 중죄로 다스려야 하겠다."

조고는 밀정들로부터 그러한 정보를 듣고,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 ! 그렇다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비밀리에 함양 태수(咸陽太守) 염락(閻樂)과 함양 방위 대장(咸陽防衛大將) 조성(趙成)을 급히 불러들였다. 함양 태수 염락은 조고의 사위였고, 방위 대장 조성은 조고의 동생이었다.

조고는 사위와 아우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말한다.

"황제가 황음무도하여, 나의 간언을 듣지 아니하고 주색에만 탐닉해 온 까닭에 나라가 이 꼴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모든 책임을 승상인 나에게 뒤집어씌워 나를 참형에 처하려고 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우리 문중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할 판인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대책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염락과 조성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조성이 몸을 떨며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은 황제에게 있는 법인데, 형님께서 무슨 죄가 있다고 우리 문중이 몰살을 당해야 합니까?"

"누가 아니라더냐.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사위 염락도 그 말에 덩달아 항의한다.

"장인어른께서 무슨 잘못이 있다고 참형을 당하셔야 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로서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조고는 아우와 사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를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네 심정이나 내 심정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상대방은 절대권자인 황제이고 나는 승상에 불과하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니냐."

"장인어른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옵니까?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 판국에 황제가 무슨 상관입니까.

황제를 우리 손으로 없애 버리면 그만이 아니옵니까."

조고가 진작부터 기대하고 있던 말이 드디어 사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조고는 진작부터 이세 황제를 죽여 없애고, 부소 태자(扶蘇太子)의 아들인 <자영> 공자를 삼세 황제로 바꿔 버릴 결심을 품고 있었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황제를 시해(弑害)하자>는 말을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아, 아우와 사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도록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사위의 입에서 <황제를 죽여 없애자>는 말이 나오자 조고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황제를 시해하자는 말이냐?"

하고 새삼스러이 다져 물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허긴 그렇지!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그런 방법이라도 쓸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아우 조성에게 묻는다.

"너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가 죽을 판인데, 황제가 무슨 소용입니까? 저도 염락의 제안에 절대 찬성입니다."

조고는 그제서야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너희들의 생각이 모두 그렇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그렇다면 이세 황제를 죽여 없애고 자영 공자를 추대하기로 하자. 자영 공자는 성품이 인후(人厚)하여, 그가 제왕이 되면 백성들도 좋아할 것이고 우리 문중도 전과 다름없이 영화를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이세 황제를 시해할 음모를 구체적으로 꾸몄다.

바로 그날 밤이었다.

염락과 조성은 정병 천여 기를 망이궁으로 몰고 들어와, 여기저기서 함성을 지르며 소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10여 명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망이궁 안으로 달려 들어와,

"역적 도당들이 대궐 안팎에서 난동을 치고 있는데, 호위 군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

하고 외치며 황제의 호위병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였다.

그리고 나서 내전(內殿)으로 달려 들어오니, 이세 황제는 어둠 속에서 몸을 와들와들 떨며 두 명의 내관(內官)들과 함께 도망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락과 조성은 황제의 앞길을 창검으로 가로막으며 큰소리로 외쳐대었다.

"황제는 황음무도하고 학정이 자심하여 만인이 공노할 죄악을 저질렀도다! 이로 인해 제후들이 저마다 배반하고 있으니, 나라를 망친 죄를 용서할 수가 없어, 우리 손으로 황제를 없애겠노라! "

이세 황제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애원하듯 말한다.

"승상은 어디 갔느냐? 승상을 만나게 해다오! "

염락이 대답한다.

"무슨 낯으로 승상을 만나겠다는 것이오? 승상을 만나게 해 줄 수 없소! "

"그러면 마지막 소원이 있으니, 나를 죽이기 전에 그 소원이나마 승상에게 전해 다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 판국에 이세 황제의 <마지막 소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점은 염락과 조성으로서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염락은 측은한 생각조차 들어서,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시오."

하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이세 황제는 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한다.

"황제의 자리를 곱게 내놓을테니, 그 대신 나를 어느 지방의 왕으로 봉해 주도록 승상에게 전해 주시오."

염락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러자 이세 황제는 비겁하게도 머리조차 굽신거려 가면서 또다시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일국의 왕으로 봉해 주기가 어렵거든 만호후(萬戶侯)로라도 봉하여 처자식과 함께 목숨이라도 보존해 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 이렇게 두 손을 모아 빌겠소이다.'

이세 항제는 무릎조차 꿇어 보이며, 두 손을 모아 빌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염락과 조성은 황제의 너무도 비겁한 태도에 증오감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그리하여 창검을 치켜 올리며,

"에잇! 이 비겁한 놈아! 너같이 못난 놈을 황제로 모셔 왔던 우리가 바보였다. 잠꼬대 같은 소리 그만 하고, 이 칼을 받아라! "

하고 외침과 동시에, 황제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렸다.

이로써, 진시황의 둘째 아들이었던 호해는 이세 황제로 등극한 지 5년이 넘도록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오로지 주색만을 즐기다가 결국은 간신 조고의 손에 무참히 죽어 버린 것이었다.

염락과 조성이 조고에게 달려와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니, 조고는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 승상부로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만조백관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서슬이 퍼런 소리로,

'"어젯밤 적도들이 대궐로 난입하여, 황제 폐하를 시해하였소. 이는 놀랍고도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나 지나간 일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새로운 임금님을 즉시 옹립해야 하겠는데, 어느 분을 신제(新帝)로 모셔야 하겠소?"

만조백관들은 조고가 황제를 죽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라, 모두가 겁에 질려 대답을 못한다.

그러자 조성이 나서며 말한다.

"자영 공자가 시황제의 장손(長孫)이오니, 그분을 신제로 받들어 모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조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한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로다. 그러면 자영 공자를 새로운 임금님으로 옹립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그분을 <황제>라는 칭호로 모시면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 우려가 농후한데, 여러분들은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만조백관들은 조고가 또 무슨 일을 꾸미는가 싶어 꿀먹은 벙어리처럼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상은 조고의 계략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형에게 묻는다.

"자영 공자를 <황제>라는 칭호로 부르면 <복잡한 문제가 야기 될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조고가 꾸짖듯이 대답한다.

"자네는 그런 이유도 모르는가? 본시 진나라는 옛날부터 임금을 <왕(王)>이라고 불러 왔다네. 그러던 것을 시황제가 무력으로 육국을 통합하고 나서 <황제(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로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 초왕이 대군을 일으켜 우리에게 공격해 오는 것은<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새로 등극하는 임금은 <황제>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옛날처럼 <진왕(秦王)>이라고 자칭하면서 옛날과 같이 육국의 독립권을 인정해 주면, 그들은 싸워야 할 목표가 없어져서 절로 물러가 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싸울 필요도 없이 적을 저절로 물러가게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말일세."

간지에 능한 조고가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못 할 잔꾀였다.

그러나 임금의 칭호를 황제에서 진왕으로 바꾼다고 해서 초군이 과연 곱게 물러가 줄 것인가?

그러나 영화의 자리를 보존하기에 급급한 조고는 그런 수단을 쓰면 만사가 쉽게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만조백관들은 조고의 <눈감고 아웅식>의 얕은 꾀를 속으로는 모두들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려면 그런 수단이라도 부려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승상의 말씀은 진실로 탁월하신 계획이시옵니다."

하고 입을 모아 동의를 표명하였다.

이에 조고는 만조백관들을 거느리고 회춘궁(回春宮)으로 자영 공자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금상 폐하께옵서 졸지에 적도의 손에 시해되셨으므로, 공자께서는 5일 동안 목욕재계 하신 뒤에, 왕위에 올라 주셔야 하겠습니다."

자영 공자는 황제를 죽인 배후의 인물이 조고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탓에 조고가 가뜩이나 죽이고 싶도록 미운 판인데, 제위(帝位)가 아닌 왕위(王位)에 올라 달라는 말까지 하고 있으니, 자영 공자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황제께서 돌아가셨다면, 나는 마땅히 <제위>를 계승하여야 할 일이지, 어째서 나더러 제위가 아닌 <왕위>에 올라 달라는 말씀이오?"

그러자 조고는 만조백관들에게 들려주었던 계책을 누누이 설명을 하고 나서,

"만약 공자께서 제위를 포기하고 왕이 되지 않으시면 등극하신 후에 목숨이 위태롭게 되실 것입니다."

하고 공갈조로 나왔다.

"알겠소이다. 그러면 목욕재계하고 닷새 후에 즉위하기로 하겠소."

자영 공자는 마지못해 일단 응락은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조고가 회춘궁에서 돌아가 버리자 자영 공자는 두 아들을 급히 불러 다음과 같은 밀명을 내렷다.

"조고는 국정을 망친 죄로 자기가 죽게 되자 선수를 쳐서 황제를 죽이고, 나를 임금으로 내세우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황제>가 아닌 <왕>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재궁(齋宮)에 참배하여 닷새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있을 터인즉, 너희들은 그동안에 한담(韓覃)과 이필(李畢)에게 급히 연락하여 재궁 뒤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게 하여라. 닷새 후에 내가 칭병(稱病)을 하고 대궐에 들어가지 않으면 조고가 재궁으로 나를 모시러 나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조고를 죽여서 선조들의 원수를 갚아야 하겠다. 내 말 알아 듣겠냐?"

자영의 두 아들은 조고에 대한 증오심에서 입술을 깨물며 대답한다.

"선조님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추호의 착오도 없이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대진제국의 흥망은 이번 거사의 성패에 달려 있으니, 깊이 명심하고 신속히 거동하라 ! "

자영은 그날부터 재궁에서 목욕재계를 계속하며, 닷새가 지나도록 병을 핑계로 대궐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에 조고는 자영을 모셔가려고 재궁으로 수레를 타고 나타났다.

그러자 한담과 이필은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군사를 일으켜 조고를 급습하였다.

조고는 크게 당황하여 수레에서 뛰어 내리며,

"염락은 어디 갔느냐! 이놈들을 당장 물고를 내버려라!"

하고 외치는데, 순간 이필이 비호같이 덤벼들어 조고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렸다.

그리하여 갖은 작폐를 부려 가면서 대진제국의 권세를 마음껏 휘둘러 오던 천하의 간신 조고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조고를 죽이고 나자, 자영은 만조백관들의 축하를 받으며 대묘전(大廟殿)에서 즉위식(卽位式)을 올리고, 자기 자신을 <삼세 황제(三世皇帝)>로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제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초군이 언제 함양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그 자리에서 중신 회의를 열고 긴급 대책을 강구하였다.

"초군이 지금 무관을 공격하고 있다는데, 어찌하면 적군을 물리칠 수가 있겠소?"

늙은 중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무관이 지금 함락 위기에 처한 모양이오니, 폐하께서는 오늘 중으로 사령관을 임명하시어 지원군을 급히 무관으로 보내셔야 합니다.'

삼세 황제는 한영(韓榮)과 경패(耿沛)를 대장으로 임명하면서,

"그대들에게 군사 5만 명씩을 줄 터인즉, 무관으로 급히 달려가 주괴 장군과 숙의하여 초군을 조속히 격파하도록 하라."

하고 명했다.

자영은 간신 조고를 죽이고 삼세 황제가 되기는 하였으나, 앞 길는 마냥 험난하기만 하였다.

[출처] 熱國誌 (51) 望夷宮의 비극과 조고의 최후 |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