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65) 논공행상 (論功行賞)

이찬조 2020. 2. 18. 08:30

열국지 (65) 논공행상 (論功行賞)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속에 부장품(副葬品)을 꺼낸 것은 항우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안식처로 지어진 지하 아방궁(阿房宮)에 불까지 질러 버린 것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 간에는, "항우는 진시황보다도 더 무섭고 무지막지한 폭군이다!"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게다가 항우가 초패왕으로 등극하고 난 뒤에도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장수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조차 베풀지 않아서, 그들 역시 항우에게 불평이 대단하였다.

범증은 그러한 불만을 알고 항우에게 간한다.

"진나라를 정벌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사온데, 장수들에게 아직도 논공행상을 내려 주지 않으셔서 모두들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데, 대왕께서는 그들을 후백(侯伯)에 봉하시옵고 식읍(食邑)을 하사 하시어 임지로 부임케 함으로써 나라의 변방을 튼튼히 수호하게 하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좋은 말씀이오. 그러면 논공행상을 하기로 합시다. 그런데 정작 논공행상을 베푸는데 걸리는 인물이 하나 있구려. 패공 유방은 어떻게 처우(處遇)했으면 좋겠소? "

항우는 <관중왕(關中王)>의 자리를 유방에게서 억지로 빼앗아 오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유방의 존재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범증은 한동안 생각해 보다가 대답한다.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여 파촉(巴蜀)으로 보내시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유방을 파촉으로? "

"예, 유방을 지금처럼 패상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면, 군사를 모아 어떤 짓을 할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한왕>이라는 명목으로 멀리 파촉으로 쫒아 버리면, 감히 다른 짓을 할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파촉으로 보내 버리면 딴 짓을 못 할 것 같소이까?"

"물론입니다. 파촉은 워낙 첩첩 태산의 산간벽지인 관계로, 그곳은 사람도 적고 물산도 빈약하여 대군(大軍)을 양성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니 군사가 없이는 어떻게 모반을 도모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러하오니 유방을 한왕에 봉하여 파촉으로 보내 버리기만 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늙어 죽고야 말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좋아하였다.

"참 기막힌 계책이오. 유방만 맥을 못 추게 해놓으면, 천하는 절로 내 것이 될 게 아니겠소?"

"그러하옵니다, 대왕전하! 그러니 논공행상이라는 명목으로 유방을 하루속히 파촉으로 쫒아 버리도록 하시옵소서."

항우는 범증의 말을 옳게 여겨, 유방을 비롯한 모든 대장들에게, <논공행상을 거행할 테니 침주로 모두들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방은 항우의 호출장을 받아 보고 매우 난처하였다. 부른다고 호락호락 달려가자니 위신이 문제요, 그렇다고 항우의 명령을 묵살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생각다 못해 중신 회의를 열었다.

"항우가 내게서 관중왕 자리를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논공행상을 하겠노라고 하면서 호출장을 보내 왔으니 이 일을 어찌해으면 좋겠소?"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지금 형편에 항우의 명령을 묵살해 버렸다가는 보복이 두렵사오니, 먼 장래를 생각하시어 가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경솔하게 달려갔다가 만약 만인의 좌중에서 모욕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소?"

소하가 다시 아뢴다.

"천만 다행으로 장량 선생이 지금 항우의 막하에 머물러 계시오니, 침주에 도착하시는 대로, 모든 일을 장량 선생과 상의하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정말 그렇구려, 그러면 장량 선생을 믿고, 용기를 내어 침주로 가보기로 하겠소이다."

유방이 항우를 찾아가니, 항우는 용상을 덩실 타고 앉아 내려다보며, 유방을 완전히 수하의 장수 취급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논공행상을 자리에서는 항우는 용상을 타고 앉아 있었고, 유방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단하에 꿇어 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자리에는 장량도 항우의 등 뒤에 배석해 있었다. 장량은 단하에 꿇어 앉아 있는 유방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윽고 군정사(軍政司)가 항우의 명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논공 공문을 읽어 내려갔다.

1. 유방 장군을 한왕(漢王)에 봉하노니, 남정(南鄭)에 도읍하여 파촉(巴蜀)41현(縣)을 다스리도록 하라.

2. 장한 장군을 옹왕(甕王)에 봉하노니, 폐구(廢丘)에 도읍하여 진령(秦領)38현(縣)을 다스리도록 하라.

3. 사마흔(司馬欣) 장군을 색왕(塞王)에 봉하노니, 역양에 도읍하여 진령11현을 다스리도록 하라.

4. 동예 장군을 적왕(翟王)에 봉하노니, 고노(高奴)에 도읍하여 서진(西秦)38현을 다스리도록 하라.

5. 영포(英布) 장군을 구강왕(九江王)에 봉하노니, 육합(六合)에 도읍하여 북진(北秦) 45현을 다스리도록 하라.

이상과 같은 논공행상을 낭독하고 난 뒤 끝으로,

1. 범증 군사를 승상에 제수하여 <아부(亞父)>로 존칭하고,

2. 항백(項伯)장군을 상서령(尙書令)에 제수하여 대왕을 측근에서 보필케 하고,

3. 종이매(鐘離昧)장군을 우사마(右司馬)로, 계포(季布)장군을 좌사마(左司馬)로 삼아, 대왕의 경호를 책임지게 한다.

논공행상에서 유방은 완전히 부하 취급을 당하는 바람에 모욕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명색은 비록 <한왕(漢王)>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살지 못할 심심산중으로 정배를 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아 간 주제에, 나를 이렇게나 홀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참을성이 많기로, 이것만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든 유방은 항의를 할 요량으로 얼굴을 들어 항우를 정면을 쏘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그 순간, 항우의 뒤에 배석해 앉아 있던 장량이 손을 들어 유방의 행동을 누르는 손짓을 해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항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유방은 그래도 참을 수가 없어서, 몸을 움직여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자 장량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항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왕 전하! 논공행상을 끝내셨으니, 이제는 제후들에게 축배를 나눠 드리도록 하소서."

유방에게 항의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장량은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윽고 항우가 주최하는 축하연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논공행상을 받은 장수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저마다 술잔을 나누며 크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화가 동하여 술을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았다.

장량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리 불쾌하시더라도, 오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마시옵소서. 축하연이 끝나거든, 이번에는 저도 패공을 모시고 패상으로 돌아가기로 하겠습니다."

유방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틔는 것만 같았다.

"선생이 나와 함께 패상으로 돌아가 주신다면, 그처럼 기쁜 일이 없겠소이다. 그러나 항우가 선생을 돌려보내려 하겠습니까?"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장량은 항우 옆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미 완성하셨으니, 저는 오늘로서 패공과 함께 일단 패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못마땅한 듯,

"아니, 나는 자방더러 언제까지나 나를 도와 달라고 했는데, 자방은 나보다 더 패공을 도와주고 싶어서 내 곁을 떠나겠다는 말씀이오?"

하며 노골적으로 나무란다.

장량은 얼른 이렇게 대답한다.

 

"대왕의 말씀은 오해의 말씀이시옵니다. 저는 패공을 돕기 위해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옵고, 저의 고국인 한(韓)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옵니다. 한왕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 주실 때, 진나라가 평정이 되거든 그날로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엄명이 계셨던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기에, 일단 패상에 들러 짐을 꾸린 후 즉시 본국으로 돌아 갈 생각입니다."

항우는 그제서야 오해가 풀린 듯,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구려."

하고 유방과 함께 돌아가기를 허락해 주었다.

[출처] 熱國誌 (65) 論功行賞 |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