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와 뉴질랜드
1994년 교육부로 올라온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대학행정과에서 서무를 맡아 원 없이 일도 해보았다. 지방대학에서는 천국이었는데....
1994년도 10월경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라며 정해진 돈을 배정해 주기에 이재헌사무관님과 둘이서 여행을 다녀오도록 하였다. 여행목적이 외국 고등교육기관의 현황을 살펴보고 오는 프로그램이어서 큰 부담은 없었다.
우리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결정을 하고 준비하는데 이사무관님은 호주/ 나는 뉴질랜드에 관한 공부를 하였다.
처음으로 하는 해외여행이라 기쁘지만 어학이 안 되어 마음에 부담이 약간 되었다. 가이드가 없어 시간이 되는 대로 영어를 공부하였다. 사전 한권은 준비하여 갔다.
호주 프로그램은 시드니대학-캔버라대학 두 곳으로 하고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대학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숙소는 시드니는 파우저 교수 도움으로 시드니대학 학생기숙사를 빌려서 2박3일 머물기로 하였고, 캔버라에서는 책자를 통해 알게 된 로찌에서 2박3일을 머물기로 하였다. 오클랜드에서는 가서 숙소를 정하기로 하였고....
11월 하순경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이기호 예산담당관님께서 계신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이라 한다. 여행계획을 받아 보니 우리가 캔버라코스일 때 그분들은 브리즈번(골드코스트)으로 올라간다. 뉴질랜드 코스는 거의 같았다. 우리는 시드니에 내려서 오클랜드대학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시드니의 아침은 눈부시다. 10시간을 달려온 항공기에서 내리니 시원한 공기가 속을 식혀준다.
시드니공항에는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한국교육관님께서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를 시드니 대학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정중히 사양하였음에도 그 분은 영국에서 4년간 근무하고 이번에 시드니로 왔다고 하며, 여기 와서 국제면허 취득 후 새차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 시드니대학에 로버트 파우저 교수를 찾아갔는데, 다른 교수님을 먼저만나 커피를 내주셨는데 우유가 썩었다고 교육관님이 알려주신다. 조교 선생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아주 미안한 표현을 하면서 잠시기다리라고 하더니 새로운 우유를 준비하여 왔다. 얼마 후 파우저를 만났고, 교육관님과 파우저 이사무관님과 함께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해결하였다. 점심식사 후 일단 숙소에 짐을 옮겨두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시드니 대학을 우리끼리 한바퀴 둘러보았다. 배꼽을 노출한 여학생들이 춤을 추는데 신기하였다. 교내에 잔디는 너무 부러웠고, 축구전용구장이 3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도서관도 구경을 하였고, 관련 서적도 구했다. 점심때 식사로 나온 쇠고기 덩이 두개 감자 하나를 먹고 하루 견디려나 했는데 든든하다. 저녁시간에는 이재헌 사무관님 외사촌이 나오기로 하여 함께 만나 그분이 가이드 해주셔서 하버터널, 하버브리지, 오페라하우스 등등을 둘러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였다. 환경이 깨끗하여 좋았고, 시민들이 운동을 많이 즐겨하고 있었다. 저녁에 샤워를 위하여 욕실로 가는데 남녀 구분이 없이 먼저 들어가는 분이 안에서 문을 잠그면 되고 화장실도 남녀 구분이 없었다. 물도 없었고 화장실에 나오는 물을 마시면 된다. 우리나라 1960년대 중반 같았다.
들째날은 먼다이비치를 비롯하여 빠삐용 영화를 촬영하였다는 갭팍(바닷가의 절벽), 타롱가 동물원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이탈리아식으로 저녁식사를 만들어 먹는 곳에 가서 직접 만들어 먹었다. 식사 후 이웃에 있는 분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고 한국에 대하여 아시는 것이 있는가 물었더니 88올림픽은 모르고, 성수대교 파괴된 것은 알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올림픽을 기억하여 줄줄 알았다. 기업체 3개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현대, 삼성, 대우 모두 일본 기업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대하여 아는게 너무 없어 속이 상했다. 한국임을 이야기해주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했다. 저녁에 킹스크로스에 나가 보았다. 이곳은 유흥가로 유명한 곳이었다. 대형 간판에 “This is Heaven”이란 간판도 있었다. 우리말로 어서오십시오. 라고 하여 속으면 안 되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잘도 속아준다. 어느한 친구가 1인당 50달러한다기에
돈도 없는데 무슨.../ No momey. 라고 하였더니 결국 둘이서 50불에 입장하기로 하고 지하로 따라갔는데 입구에서 팁을 달랜다. No money. 하고 되돌아 나오려니까. 들어오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들어가서 처음 보는 아가씨가 술은 뭘로 할 것인가를 묻는다. Beer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자리에 와서 앉았는데 앞무대에는 쑈를 하고 있었다. 어떤 여성이 다가오더니 등 뒤에서 어깨를 만지면서 귀에다 대고 맛사지 받겠느냐고 묻는다. 아니라하여 보냈더니 이번에는 다른 여성이 오더니 술은 뭘로 하겠느냐고 문는다. 나는 맥주라고 하였더니 금시 맥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처음 시킨 분과 동일한 줄 알았는데 조금 있으니 다른 여성이 맥주를 가지고 왔다. 마시고 있는데 다른 여성이 맥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가지고 와서 먹고 있는데 필요 없으니 가지고 가도록 하였는데 들어올 때 주문하지 않았느냐 하며 막무가내다. 여기 와서 다른 분이 시켜서 먹고 있다하여도 그것은 내가알바 아니라고 한다. 할 수 없이 마시기로 하였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보다 예쁘게 생긴 여성이 오더니 맛사지 오아 쎅? 귀에 대고 말한다. 안그래도 기분이 나쁜데 퉁명스럽게 “돈 없어” 해버린다. 그때 무대위에는 뱀쑈를 하고 있었다. 뱀을 목에 걸고 여성이 홀로 나오자 이사무관님이 무서워서 후다닥 피한하가 이웃집 술상을 흔들어서 술잔이 넘어졌다. 그분들도 한국 분들이었다.
백인여성은 없었고, 쑈에 나오는 분들은 흑인 또는 동남아 쪽 황인종이었다. 밤늦게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홍콩분이다. 우리가 한국인인줄 알아보고 이쪽 시드니 살인사건이 몇 일전에 났다고 알려 준다.
일반적으로는 7시가 지나면 시가지에 사람들이 거의 없단다.
3일째는 또 다른 비치에 배를 타고 건너갔는데 그쪽 비치에서는 500m 이내는 가슴을 드러내 놓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광욕을 즐기는 여성들은 실제 가슴을 드러내 놓고 남자친구와 즐기고 있었다. 나를 찍는 체하고 옆에 있는 그녀를 찍어준다. 잠시 쉬었다가 벤치로 돌아와서 카메라를 두고 먹을 것을 먹는데 갈매기가 와서 나눠먹자고 하여 이사무관님이 갈매기 쫒다가 카메라를 떨어뜨려 망가졌다. 돌아오는 선상에서 어린이와 동행하는 부모를 만났는데 아이가 울면서 대~디 대~디 하고 운다. 엄마는 본체만체하고 아빠가 수습하여준다.
오후에는 시드니 공항으로 오는데 버스를 탓다. 버스에서는 운전기사가 즉시 영수증을 뽑아준다. 시드니공항에서 캔버라행 비행기를 탓다. 퀀타스항공사였다. 캔버라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우리가 찾는 로찌로 왔다. 일단 2박3일 계약서를 쓰고 저녁을 먹기 위하여 시내로 나왔다. 4Km정도 나와도 식당이 없다. 할수 없이 호텔로 찾아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곳에서 비프스테이크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이곳에서는 별자리를 보라하여 보니 유난히 빛난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침대에서 자본다. 캔버라는 일교차가 너무 심하였다 밤에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4일째 아침에 일어나니 독감이다. 목소리가 완전히 변성인지라 아침식사시간에 주인에게 Catch a cold.라고 하였더니 식사 후 곧장 약을 지어 왔다. 아침식사 후 젊은 여자아이가 담배를 피우는데 전혀 어른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기에 나중에 보니 일본아이였다. 약을 먹고 캔버라대학교로 향하여 갔다. 일단 서점에 들려 서적을 둘러보는데 한국과 관련된 책이 있어 반가 왔다. 사전인데 가격이 한국의 3배 이상 되었다. 그리고 잡지를 구경하였는데 잡지책안에 콘돔을 끼워두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국제교류센타를 통하여 학교에서 자료를 구하고, 구경을 마치고 시내로 와서 ‘원초적 본능’을 보고자 하였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5일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캔버라 호수의 유명한 분수를 구경하고 국회의사당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캔버라는 인구 30만 정도의 소도시였고, 인적도 드물었으며, 도로는 정말 잘되어 있었다. 양차선 중앙에는 화단이 조성되었고 외부로 빠져나오는 길은 또 다르게 분리시켜두어 교통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 구성되어 있었고, 이곳은 한국의 5월 날씨 정도로 호박이 한 키 정도 자랐고, 뽕나무가 무성하게 잎이 피었으며, 장미가 한창이어서 아름다운 정원들이 부러웠다. 아침저녁으로 숙소 인근을 산책할 때마다 느끼지만... 조깅을 하는 분들이 많았고, 바람이 불어와도 먼지가 나지 않도록 흙은 나무껍질을 두껍게 쌓아서 먼지가 나지 않고 스프링클러를 통하여 꽃과 잔디밭에 물을 뿌려주고 있어 잔디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다. 편지함과 쓰레기통도 분리수거로 잘 되고 있었다. 휴지의 품질이 좋아서 부러웠다.
캔버라에 3일을 머물 예정으로 왔는데 별로 구경거리가 없어서 오늘저녁 시드니로 나가기로하고 주인집에 와서 계약서를 변경하여 1받2일로 바꾸고 돈을 돌려받고 공항으로 와서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다. 역시 퀀타스인데 한국인 유학생이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면서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동네의 특성과 생활상 등등...자신은 한학기 벌어 다음 1년간 수학하면 석사를 마친다고 한다. 시드니로 돌아와 이재헌 사무관님의 사촌이 경영하는 킹스크로스 캐피탈호텔에서 하룻밤 묶기로 하였다. 그는 그 호텔의 총괄지배인이었다. 다음날 아침 계산서를 보니 50달러였다. 시드니 대학 2박3일보다 비싸다. 저녁 식사후 매니저와 함게 이야기중에 태즈메이니아의 한분이 우리고아들을 데려와 학교를 대상으로 흥정을 하는 이야기를 듣고 속이 상했다. 이학교 저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의 생활수단으로 이용되는 한국에서 온 고아들이 불쌍하기도 하였고...
6일째는 캔버라에서 보낼 시간이었는데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나는 멜버른 12사도 탑도 보고자 하였으나 사무관님이 시드니 가서 하루 쉬자하여 시드니로 왔다가 북쪽으로 2시간거리에 있는 뉴캐슬에 가보기로 하여 시드니 중앙역에서 열차를 탓다. 열차는 왼쪽 태평양을 끼고 북으로 가는데 어디쯤엔가 터널을 빠져나오니 바다위로 가고 있었다. 뉴캐슬에는 비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조약돌들이 하얗게 빛나고...언덕위에 성당이 있어 돌아보는 등 시간을 보내고 밤 10시까지 시드니공항에 와서 오클랜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시드니로 돌아와서 10시경 오클랜드비행기를 탓는데 잠이 들었다. 오클랜드에 내려서 이기호 과장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YMCA호텔로 가서 머물기로 하고 택시를 탓다. 택시라는게 한국의 봉고차였다. 자정이 넘어도 초저녁같은 분위기였다. YMCA에 도착하여 리셉션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로비에 와 있는데 의자 아래에서 사람이 기어 나온다. 70대 중반의 남자인데 소오르(일본식 서울발음)안다고 한다. 나는 이 분이 한국인인데 대동아 전쟁때 일본을 통해 나왔다가 이렇게 된게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하였다. 먹을 것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카운터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외부로 나왔다. 다른 호텔이라도 찾아보려고 거리를 거니는데 길옆의 가라오케에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12:40분쯤 되었는데 앞에 누가 오니 반가와서 인사를 건너는데 우리말로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저도 한국인입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중 이란다. 인근에 호텔이 없어 YMCA밖에 없단다. 우리는 01:00이 지나서 YMCA에 투숙하였다. 깨끗하고 쉴만하였다.
7일째는 오클랜드대학에서 오전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부산경남 중등교사 팀과 우리 두 사람이 동행하기로 하였다. 일단 교통편이 제공되어 좋았고, 동료들이 많아 재미있었고, 재주꾼들이 많아 우리를 들어내 놓는데도 손색이 없었다. 다만 우리 두 사람의 입장료, 숙소를 따로 계산하게 되었다.
오클랜드 대학에서 자료를 구하고, 대학생 알바생에게서 오클랜드대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에덴공원으로향하였다. 에덴공원이란 오클랜드 시가지 중심에 있는 작은 산인데 분화구를 개발하여 에덴공원이라 부르고 있었다.
8일째는 로투루아로 갔다. 민속촌에 오니 버스에서 내리자 여성이 한분 나와서 코를 비비는 인사법을 안내하여 준다. “퀴오리” 라고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사진을 못 찍었다. 원모어 라고 하여 웃었다. 오후시간에는 민속촌과 양털깍기 쑈도 구경을 하였다. 숙소로 와서는 저녁 먹으면서 민속 쑈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9일째는 폴리네시안 온천, 간헐천과 오색호수 등을 구경하도록 스케줄이 되어있었다.
오전은 간헐천을 개발하여 휴화산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안전한 범위에 통로를 만들어 구경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온천수 옆에서 짐질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곳도 있었다. 그리고 오색으로 물든 호수며 약간의 산행을 곁들인 관광코스는 잘 개발되어 있었고 우리말 안내도까지 비치하여 두어 기분이 좋았다. 온천은 남여 혼탕인데 팬티 차림이었다. 36도부터 56도까지 있었는데 높은 온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가며 훈련이 되어야 하였다.
10일째는 호수에서 배를 타는데 “ 비바람이 치는 바다” 의 전설이 있는 호수였다. 우리 일행 외에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리 일행 중 음악교사와 음악을 좋아 했던 국어 선생님이 합창으로 노래를 한 곡하니 모두 좋아 한다. 전설을 듣고 호수여행을 마치고 이동하여 점심을 목장에서 먹게 되었다. 나는 맥주 2박스 안주로 과일을 중간에 오면서 준비하여 선생님들에게 접대하였다. 목장 주인과 함께 사진도 한 컷하고 목장의 넓이는 하동군과 남해군을 합한 면적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반딧불 동굴에 가보고 동굴 안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등 우리 두 사람의 스케줄에 없던 재미난 경험들을 하게 되어 좋았다. 그리고 해밀턴을 지날 무렵에는 발전소로 쓰다가 폐기한 발전소를 언젠가 미래를 위해 잘 보존하는 모습도 보았다.
오클랜드에 와서는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동안 피곤하였으니 실컷 자고 싶었다. 이사무관님은 와인을 한 잔 하면 잠이 잘 온다고 하여 내게 한잔을 권한다. 한잔하고 쉬는데 이게 웬일 화장실로 들락날락 토하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내생에 처음으로 와인을 먹었던 것인데...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르겠다. 2-3시간동안 고생을 하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태평양 상공을 11시간 날아와야 하는데.... 언제 서울 도착하는지??? 서울에 도착하니 일요일 아침이었다. 코는 흑인처럼 하고는 교회에 갔더니 모두 웃는다.
고생도 되었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햇볕차단제도 하나 준비하지 않고 갔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다.
15년 전의 경험으로 많이 잊어 먹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만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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