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34)> 예종 성종 4- 폐비윤씨 그리고 불행의 전조!

이찬조 2021. 3. 29. 21:15

<조선왕조실록(34)> 예종 성종 4
- 폐비윤씨 그리고 불행의 전조!

성종 4년, 가난한 집 선비 윤기무(또는 윤기견)의 딸이 성종보다 12살 많은 나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윤씨는 후궁 시절 대왕대비와 왕대비 등 대궐의 어른들을 잘 봉양하여 이들의 총애를 받았고, 중전 한씨(한명회의 딸)가 죽자 임신타법을 사용해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윤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아들까지 출산하니 이 아들이 바로 연산군입니다.

가난한 집 선비의 딸로 태어나 인생 역전의 대박을 터트린 중전 윤씨, 그 녀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빛날 것 같았으나, 그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실록에는 중전 윤씨의 죄가 세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형을 만들어 저주한 일,
음조의 공은 없고, 투기하는 마음만 가진 일,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한 일,
무자(無子)하게 하거나 반신불수가 되게 하는 등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 일,
엄소용, 정소용이 서로 통하여 중전 윤씨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의 집에 던져 넣은 일,
왕을 바라볼 때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은 일 등이 그것입니다.

중전 윤씨는 위와 같은 일들로 폐위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약을 받고 사사되고 맙니다.

일국의 왕비가 폐비되고 사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인데, 폐비 과정에 궁궐 여인네들의 암투가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이 외에 특별한 정치적 긴장관계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폐비 윤씨에게 실제로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폐비 윤씨가 끝내 사약까지 받게 된 것은 만약 폐비 윤씨가 살아 있는 가운데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경우, 폐서인 과정에 관련된 자들이 보복을 당할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이들이 이를 두려워해 사약을 내리도록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폐비를 사사했어도 이와 관련해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니, 이는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사하면서도 정작 그 아들을 그대로 원자의 자리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한명회 등 여러 신하들은 장차 폐비 윤씨의 아들이 왕이 되어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예상했으나, 그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성종에게 대놓고 원자를 폐하라는 불경한 주장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어린 원자에게 폐비 윤씨의 일을 알리지 말 것과 누구도 이때의 일을 입에 올리지 말 것을 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종의 생각일 뿐, 성장하여 어미의 일을 궁금해 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으며, 그러한 자식의 효심을 이용해 정치적 성공을 거두려는 자들의 출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성종과 그 어미인 인수대비의 판단은 실로 아둔하고 그 이후의 일은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성종은 배꼽 밑의 작은 종기에서 비롯된 병으로 갑자기 기력을 잃고 1494년에 죽으니 재위 25년에 향년 38세였습니다.

성종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착하고 여린 그 아들이 아비의 뜻에 반해 어미의 일로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킬 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