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35)> 연산군일기 1- 연산의 초반 모습

이찬조 2021. 3. 29. 21:21

<조선왕조실록(35)> 연산군일기 1
- 연산의 초반 모습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아버지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그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 등 잔병치레가 잦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왕자같지 않고 삐리리한 모습에 별로 신경이 안쓰임)

연산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세자 시절에 이미 어미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연산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정의 경계심 자극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으므로, 일부러 모른 척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지혜로운 왕자였는데~/)

연산의 아비 성종은 모범군주답게 대간(고려~조선시대 감찰임무를 맡은 대관과 국왕에 대한 간쟁업무를 맡은 간관의 합칭으로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군주, 백관의 과실을 간쟁,탄핵하는 등 실세 중의 실세였다)들의 입바른 간언(전하 아니되옵니다~~)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연산은 성종이 대간 등 신하들을 억눌러 제압하지 않는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연산은 성종의 굴복으로까지 보이는 부드러운 통치에 대한 반감과 아직은 가슴속에 눌러만 가지고 있는 폐비 윤씨의 일로 인해 속은 늘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은 즉위하자마자 불교식 제사를 지내는 문제, 성종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 등에서 신하들 특히 대간들과 대립하였고, 이 과정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강경책을 폈는데, 연산의 이러한 말이 갖는 무시무시한 의미를 이때는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연산의 강경책에 대간들은 연산의 버르장머리를 잡겠다는 듯이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집단사직 등 더욱 강한 초강경책을 펴니, 아직 힘이 미미한 연산으로서는 분통터지지만 대간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산은 즉위 4년까지 대간들과 사사건건 부딪쳤고, 그 때마다 대간들의 집단 사직, 복직이 이어지는 양상이었으며, 비록 겉으로는 대간들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와 같은 시간은 연산의 힘과 내면의 의지를 점점 강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연산은 곧 터질 무오사화 전까지만 해도 권세는 임금에게 있어야 한다는 왕권에 대한 인식,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등의 현실적인 힘의 관계를 잘 이해했고, 신하들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도록 힘쓰는 한편, 국정운영에도 꽤 신경을 쓰는 등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제법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자질을 보였던 것이지요.

그동안의 연속극 등을 보면 연산군이 즉위하자마자 자기 어미의 복수를 한다고 마구잡이로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하나, 연산군은 실은 상당한 기간 동안 보통 이상의 선정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무오사화 등의 기회를 이용하여 절대군주의 자리에 자력으로 오르는 등 고도의 정치력을 보유한 군주로 보는 것이 적정합니다.

물론 연산군이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에 대한 복수를 시작함으로써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택하게 되나, 이는 연산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미인 중전을 폐해 사사까지 하면서 그 아들을 그대로 세자로 둔 성종과 인수대비의 업보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