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36)> 연산군일기 2- 사화(士禍), 그리고 무오사화의 시작

이찬조 2021. 3. 29. 21:21

<조선왕조실록(36)> 연산군일기 2
- 사화(士禍), 그리고 무오사화의 시작

사화(士禍)는 조선시대에 조정 중신과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개국 이래 세종 성종 등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선비들 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향토관계 등으로 파벌이 생겼는데, 이를 크게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입니다.

훈구파는 세조의 정난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땅을 소유한 일파로서 정인지, 신숙주, 이극돈 등이 그 일파입니다.

그리고 사림파는 경상도 출신의 대학자 김종직을 필두로, 그 제자인 정여창, 김일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로서, 사림파는 세조의 정난에 동의하지 않으나 기회가 오면 정부 요직에 들어가 포부를 펴보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훈구파와 사림파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1차로 맞붙어 사림파의 선비가 무수히 죽는 사건이 일어나니 이것이 바로 연산군 시대의 무오사화입니다.

연산군 시대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2차 사화가 또 다시 발생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입니다. 이와 같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와 더불어 후대의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합쳐 4대사화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정쟁은 크게 보아 훈구파와 사림파가 끝없이 대를 이어 대립하고 분파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이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는 불가피합니다.

지금부터 연산군 시대의 1차 사화인 무오사화를 간결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의 수장 이극돈(훈구파)은 사초, 즉 사관들이 비밀리에 작성하는 실록 편찬의 기초자료를 살피던 중 자신에 대한 민망한 기록(불경을 잘 외운 덕에 전라관찰사가 되었다는 등)을 발견하고, 이를 작성한 사관인 김일손(사림파)에게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사초에서 다른 문제의 기사를 찾아 볼 요량으로 사초를 자세히 보다가, “김종서, 황보인 등은 절개를 지키려다 죽었다”는 등 세조 집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세조는 아들인 의경세자의 후궁 권씨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권씨가 세조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등 세조를 비하하는 경천동지할 기록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무언가 피바람이 불 것 같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