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37)> 연산군일기 3
- 무오사화(戊午士禍)(1)
사초를 살피다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거기에 세조가 며느리 격인 여자를 탐했다는 내용의 사초를 본 이극돈은 사지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극돈이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사초의 내용은 본래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연산이 알게 되면 실록청의 당상인 자신이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기에, 이극돈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이극돈은 평소 아이디어가 풍부한 유자광을 찾아갔습니다.
유자광은 학문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당구, 골프, 바둑, 고스톱 등 다방면에 큰 재주를 가졌으나 서자 출신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에 사회불만이 많은 자였는데, 세조 시절에 과감한 행보로 세조의 파격적 총애를 받다가 김종직의 제자인 사림파의 공격으로 출세의 길이 막힌 관계로 사림파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사람이었습니다.
유자광은 이극돈으로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안의 폭발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즉시 훈구파 중신들을 찾아가 상의한 후, 연산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잖아도 피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연산군에게 이자들은 자기들 무덤을 파는 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지요.
유자광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연산은 사초를 볼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사초 일부를 직접 본 후 분노하여 김일손을 잡아들여 사초에 기재된 사실에 대해 엄한 문초를 하였습니다.
김일손은 고문에 못 이겨 김종서에 관한 이야기와 세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출처를 모두 밝혔고, 그 출처를 조사해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연루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유자광은 사초에서 종전 것보다 훨씬 중대하고 폭발성이 강한 내용을 발견하게 되니, 이는 바로 역사시험문제에 무지하게 많이 나오는 “조(弔)의제문"이었습니다.
“조(弔)의제문”은 초나라의 왕인 “의제”가 “항우”로부터 맞아 죽은 것을 슬퍼하며 “의제”를 조문한 것인데 이것이 무슨 문제일까 싶겠지만, 유자광은 이 글의 깊은 뜻과 엄청난 파괴력을 단 번에 파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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