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99)> 숙종 5 - 장희빈(2)

이찬조 2021. 5. 4. 06:03

<조선왕조실록(99)> 숙종 5 - 장희빈(2)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시켜 주었고,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했습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그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숙종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그녀를 불러다 종아리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장희빈은 이를 악물고 종아리를 맞으며 반드시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688년 장희빈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왕자 윤(뒤의 경종)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여덟에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은 참으로 컸고, 특히 그 아들이 총애해 마지않는 장희빈이 낳은 것이니 그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숙종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희빈의 모친이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들어오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당하관의 아내가 뚜껑이 있는 옥교를 타고 왔다는 이유로 그 종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숙종은 전교에 따라 입궐한 왕자의 외조모에게 모욕을 주었다며 크게 분개해 사헌부 법리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했는데, 이들을 얼마나 세게 때렸던지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숙종 15년 1월,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인 숙종은 마뜩치 않아 하는 대신들의 뜻을 누르고 아직 뒤집기도 하지 못하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을 희빈(정1품)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젊었고(28세와 21세), 따라서 정비인 인현왕후가 대군을 낳을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한 것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상당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무리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뒤집기의 달인 숙종이 또다른 뒤집기를 위해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