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77 - 명종 10

이찬조 2021. 8. 10. 21:03

고려왕조실록 77 - 명종 10

-  봉사십조(封事十條)와 명종의 죽음.

 

 

명종으로부터 거사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최충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 거사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보다 확고히 인식시키기 위해 “봉사십조" 를 명종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는 왕에게 정전(正殿: 조회를 하던 궁전. 즉 延慶宮을 말함)으로 환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1171년(명종 1)에 연경궁(延慶宮)이 불에 타자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는데, 연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복구가 불길하다는 설을 믿고 환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소궁(三蘇宮)을 경영하면서 국력만 소모하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제2조는 필요 이상의 관원, 즉 용관(冗官)을 도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무신정권 성립 후 무신들의 압력으로 양부(兩府: 宰樞) 이하 여러 관직의 인원을 늘리어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드러냈었는데 이를 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작은 정부. 

 

제3조는 토지의 점유를 시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권세를 잡은 무신들이 대토지를 점유했는데,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고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민생고와 국가의 재정난이 심각하였습니다.

 

제4조는 조부(租賦)를 공평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기강이 문란했던 무신정권 초기에 중앙권력을 배경으로 한 지방관의 탐학과 횡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먼저 세금과 부역을 공평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5조는 왕실에 공상(供上)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당시 지방을 시찰하는 사신들이 왕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재물을 수탈하여 역(驛: 또는 驛傳)으로 운반해 사복을 채우는 자가 많아 폐단이 컸었습니다.

 

제6조는 승려를 단속하고, 왕실의 고리대업을 금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승려들이 궁중을 출입해 왕을 현혹시키거나, 무신정권에 도전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최충헌으로서 그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였겠지요. 또 왕실을 비롯해 귀족, 사원들이 민간을 대상으로 고리대업을 행하여 폐단이 컸던 것입니다.

 

제7조는 청렴한 주·군(州郡)의 관리를 등용하라는 것이엇습니다. 탐학과 횡포를 일삼던 지방관 아래의 향리들 또한 지방관을 믿고 횡포를 자행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렴한 향리를 등용하고 썩어빠진 향리를 물리치라는 청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제8조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사치를 금하고 검소, 절약을 숭상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저택을 경영하고, 화려한 복장에 귀중한 보배를 장식하던 귀족들의 사치풍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시의에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제9조는 비보사찰(裨補寺刹: 나라의 운명을 돕는다는 설에 의해 세워진 사찰) 이외의 사찰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왕실·귀족들은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남설하였고, 승려는 승려대로 사원을 남설하여 폐단이 컸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최충헌에게 불교를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엿보입니다. 

 

제10조는 관리들이 아부함은 물론, 언론을 맡은 성대(省臺)의 관리까지도 아부를 한다고 지적하고, 인물을 가리어 등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시의에 적절한 것이었고 폐정을 시정하려는 충정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최충헌은 왕의 측근을 지키는 50여명을 추방하고 나서 독재정치의 발판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명종이 봉사십조를 지키지 않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197년 66세나 된 당시로서는 고령에 고령의 명종을 협박하여 단신으로 향성문을 나서게 하여 창락궁에 감금해버리고 태자 도(徒)는 강화도로 추방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명종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새로운 왕(신종)으로 세우고 그의 아들 연(淵)을 태자로 삼습니다. 

 

창락궁에 갇힌 명종은 1202년(신종5) 9월에 이질에 걸렸는데 신종이 의원과 약을 보내려 하였으나 본인은 28년간이나 왕위에 있었고 나이가 72세 이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고 하며 거절하고 결국 11월 무오일에 운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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