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78 - 신종 1

이찬조 2021. 8. 10. 21:05

고려왕조실록 78 - 신종 1

- 신종(神宗)의 등극  

 

명종에게는 무신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흥과 일신의 안일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친형인 의종의 허리를 꺾어 참혹하게 죽인 이의민에게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의 눈치나 보면서 살다가 결국은 또 다른 무력에 의해 비참한 생을 살다가 마감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명종을 쫓아낸 최충수 일당은 누구를 왕으로 내세울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는데, 동생 최충수는 “사공(司空) 왕진(王縝)은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면 국가의 중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사촌인 진(縝)을 왕을 시키자고 하였는데, 이는 최충수가 왕진의 여종을 총애한 나머지 왕진을 왕으로 세우고자 한데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충헌은,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은 임금의 친동생이며 지략이 깊고 도량이 넓어서 제왕의 국량을 가지고 있다. 또 그의 아들 왕연(王淵)도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태자로 삼을 만하다.”고 민(旼)을 왕을 시키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박진재가 “왕진과 왕민은 둘 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 왕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므로, 만약 왕진을 옹립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니 왕민을 옹립하는 것이 낫습니다. 옛날 의종의 경우처럼 동생으로 뒤를 잇게 한 것이라고 보고한다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 왕민을 옹립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왕을 정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1197년 9월 명종의 동모제(同母弟)인 민(旼)을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바로 고려 20대왕인 신종입니다. 이름은 왕탁(王晫)으로 원래 이름은 왕민(王旼)이었으며 자는 지화(至華)였습니다. 신종은 1197년 10월에 이름을 탁으로 고쳤는데, 이는 금나라 임금의 이름과 같아 탁으로 개명을 한 것인데, 이 때문에 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탁자 성을 가진  고려의 백성들은 외가의 성을 따르게 되었고, 본가와 외가의 성이 같을 경우에는 친조모나 외조모의 성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성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인 신종은 인종 22년 갑자년 7월 경신에 태어났고, 장성한 후 평량공(平凉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명종 27년 9월 계해일에 54세의 나이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군왕이지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나 맞추어 주어야하는 왕 신종은 6년4개월여의 재위 기간 동안 힘과 권위를 잃은 왕의 비애를 통감하며 한숨으로 오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던 최충헌 일파는 더 이상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궁궐을 손바닥 위의 공깃돌처럼 임금을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최충헌 일파가 무언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면 그뿐인 왕,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그들이 쥐고 있기에 앉으나 서나 가시 방석이었고, 행여 그들의 뜻에 거슬려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가슴을 조이는 나날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왕권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왕실의 권위와 성스러움을 내팽개친 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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