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0 - 충렬왕 1

이찬조 2021. 8. 21. 09:34

고려왕조실록 100 - 충렬왕 1

-원나라의 부마 충렬왕

 

원종의 뒤를 이은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은 이름이 거 또는 심 또는 춘이라 불렸습니다. 그는 1236년 2월에 원종과 순경태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고종이 죽었을 때 아버지 원종이 원나라에 가 있었던 관계로 고종의 유서에 따라 임시로 국사를 대리한 바가 있었습니다. 1267년 태자로 책봉 되고나서 5년 뒤에 원나라에 체류하게 됩니다. 몽고는 속국에 해당하는 고려의 차후 보위에 오를 태자나 왕족을 본국에 데려다 세뇌교육을 시켜왔는데 말하자면 명색만 다르지 볼모나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은 고려 왕실과 원나라 사이에 맺은 첫 번째 혼인으로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선 고려 왕실은 막강한 원나라 왕실과의 혼인으로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됨에 따라 대신들에게 억눌렸던 힘과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고 양국의 우호관계가 돈독해지는 효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원나라의 세력권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사사건건 원의 간섭을 받아야하는 종소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충렬왕이 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을 허락받고 이듬해 귀국할 때 몽고족과 같은 변발에 호복을 착용하여 고려 백성들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모든 사회성이 몽고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1274년 8월 원에서 돌아온 충렬왕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해 10월에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결심하고 군사 25,000명을 파견하자 고려에서는 8,000명의 군사와 600여명의 뱃사람을 동원하여 일본으로 출정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일본 일기도에 도달한 정벌군은 1,000여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는데 가는 길마다 일본인의 시체로 들판을 매울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은 밤이 되어 폭풍우가 무섭게 일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적지 않은 수가 파손 침몰되어 1차 일본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일본 정벌군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조정에서는 제국대장 공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10월 신유일 제국대장 공주를 맞이하러 나간 왕의 수행원 중에 몇몇 대신들이 변발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왕이 심하게 책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얼마나 몽고의 영향이 컷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해 11월 왕과 공주의일행이 개경에 도착하였을 때 재상과 관원들이 국청사 문 앞까지 나가 왕 일행을 영접하였는데 이때 호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골라내어 회초리로 마구 때리게 한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왕이 앞장서서 몽고의 풍속을 쫓으니 제구대장 공주 역시 고려의 풍습을 무시하고 자기나라의 풍속만을 고집하니 자연 이러한 풍속이 사회전반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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