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고려왕조실록 102 - 충렬왕 3

이찬조 2021. 8. 23. 20:53

고려왕조실록 102 - 충렬왕 3

- 고려영토의 회복 그리고 불행의 서곡이 시작되다.

 

  

1277년 후반에 고려에서는 고발과 무고 사건이 두 차례 일어난 바가 있었는데, 환관 양선과 태수 장 등이 원종의 제2비인 경창궁주 유씨와 그의 아들 순안공 왕종이 공모하여 승려이자 장남이기도한 종동을 시켜 충렬왕의 수명을 저주하였다고 고발한 것이 첫 번째 사건입니다.

 

이에 충렬왕은 계모 경창궁주를 폐하여 평민으로 삼고 왕종과 종동을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이어서 12월 정묘일에 김방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대장군 위득유가 고발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으나 문제는 이전에 몽고에 투항하여 몽고의 고려 침략을 크게 도운바 있었던 홍다구가 귀국하여 김방경을 고문하여 일부러 사건을 크게 확대하여 고려를 난처하게 만듭니다.

 

이 사건으로 원나라로부터 충렬왕이 직접 입조하여 진상을 보고하라는 명을 받게 되는데, 충렬왕은 오히려 홍다구의 만행을 보고하고 전에 몽고에 바친 동년부와 수안 그리고 곡주를 돌려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고 원이 이를 승인하자 고려는 잃어버린 서북면 일대의 국토를 회복하였고, 1294년에는 탐라를 돌려 받아 제주라 명칭을 바꾼 뒤에 목사를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는 개가를 올리게 됩니다.

 

원나라의 이익과 비위 맞추기에만 충실했던 충렬왕이 고려를 위해 큰일을 한 가지 한 셈이었습니다. 

 

충렬왕은 젊은 시절에 종실 시안공 인의 딸 정화궁주 왕씨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충렬왕의 즉위와 함께 정화궁주에 책봉되었는데, 원나라의 제국대장 공주가 고려로 온 뒤로는 제2비로 밀려나 별궁에 머물며 충렬왕과는 가까이 하지도 못하는 외로운 생활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한나라의 제1 왕비가 제2 왕비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서 별궁에 갇히다시피 한 것은 동서 고금을 통해 볼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원나라 황제의 딸 제국공주가 가진 힘이 그만큼 막강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국공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화궁주가 무녀를 동원하여 자신을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정화궁주와 왕숙 김방경 등을 잡아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후에 誣告(무고)로 밝혀져 放免(방면)되긴 하였지만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녀는 때때로 충렬왕 이상으로 권력을 휘두르며 정사에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충렬왕은 이에 厭症(염증)을 느끼고 사냥에 집착하고 酒色(주색)에 빠져 지냈는데 이로 인해 충렬왕과 후에 충선왕이 된 왕자 장 사이에 反目이 생기게 됩니다.

 

충렬왕과 만년에 펼쳐 질 충선왕의 반목과 불행은 이때부터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1281년 5월 여몽 연합군이 다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떠납니다. 고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병선 900척과 뱃사람 및 군사 2만5000명을 지원하고 군량미 11만석을 준비하였습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호구 수가 워낙 적어 농민에 이르기까지 장정이란 장정은 다 징발하였지만 그 인원을 다 채울 수가 없어 원나라에 형편을 보고하고 원으로부터 돌려받은 동년부 등 북방의 주민들까지 동원하여 그 수를 겨우 채우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 폐해가 적지 않았고 그리 동원된 군대가 얼마나 전투력이 있었겠습니까.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지요.

 

6월에 일본에 도착한 정벌군은 처음에는 일본군 300여명의 목을 베는 등 승리를 하는 듯 하였지만, 여몽 연합 15만 대군으로도 결국 일본 정벌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번에도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 수였던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일본 정벌에 실패하였지만 쿠빌라이는 그 후로도 두 번씩이나 더 일본 정벌을 강요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려가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보다 못한 충렬왕과 제국 공주가 원을 직접 방문하여 일본 정벌의 불가성을 호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이를 계속 고집하다가 이듬해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나서야 일본 정벌론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