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극 백범 김구를 보고서
2012.9.13.서울대 문화관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대기를 창과 춤으로 엮어서 2시간동안 장엄하게 공연을 한다.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김창암이다.
18세가 되던 해에 동학에 입도하면서 이름을 김창수로 개명한다.
몇 달 후에 동학교에서 연비가 수천 명이 되어‘아기접주’란 별명을 얻는다.
19세에 동학군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구월산 패엽사로 후퇴하여 군대를 훈련시킨다.
나의 나라를 잃으면 머슴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활동을 함으로써 그 주민들로부터 소년장수 김창수라 불려진다.
당시의 조선은 국모를 시해 당하였고,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충신 민영환은 자결하였으며,
고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 백성들은 마음을 모우지 못하고 흩어진다.
이때 매국노는 일본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은 일본이 노일전쟁을 승리하여 이제 그 누구도 일본을 감당할 수 없는 파워임으로
우리도 일본에 속국이 됨이 옳다고 본 것이다.
한편 나라를 잃으면 머슴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 김창수는 치세포에서 21세의 나이로
일본의 육군중위 스치다가 민심을 살피려 주막에 와서 막걸리 한잔을 하려는데 김창수가 시비를 건다.
고향이 어디오? 본이 어디냐고... 본을 알지 못하던 일본의 장교는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데 김창수는 그가 품에 차고 있는 칼을 알아보았고,
황해도말씨가 아닌 서울말씨 임을 들어 그가 속이는 것을 보고 시비 끝에 칼을 빼든 왜군장교를 그는 맨손으로 잡아 죽이고.
이를 주막 앞에 크게 “국모 시행의 원수 왜적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방을 붙이고 본인은 해주 백운방으로 간다고 전하도록 하고 해주로 간다.
그는 이 사건을 國母報讎(국모보수)로 살해 응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순수히 잡혀 사형을 언도 받고 대기중인데 민심은 국모를 죽인 일본군은 왜 사형에 처하지 않고 김창수를 사형하려느냐고 사형 구명운동이 일어난다.
고종은 사형직전에 사형집행 정지하라는 특명을 내려 그를 구한다.
1년여를 감옥생활을 하다가 탈옥을 결심하고 23세에 탈옥한다.
공주 마곡사 스님이 되어 법명은 원종이다.
그리고 방랑생활이 이어졌고, 어머니는 나의 아들 이전에 나라의 아들임을 강조하여 할일을 하도록 권면하신다.
한편 아내도 가정과 자식걱정을 말라하고 오직 조선을 위하여 남편이 흔들림 없이 일하도록 힘을 실어 준다.
25세에 이름을 김두래로 변명하고 강화 김주경을 찾아가나 그의 친구 유완무를 만나 이름을 金龜로 개명한다.
이땅의 모든 백성이 함께 가야 할길 독립을 향한 길을 찾아 상해 임시정부로 떠나간다.
그곳에서 1932년 1월, 이봉창을 일본으로 일왕 히로히토 저격하도록 먼저 보내고,
그해 4월 윤봉길을 상해 홍구공원으로 일왕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투하를 하도록 보내면서
이 땅에서 마지막 장면을 사진으로 담아둔다.
지하에서 만나자는 마지막 인사를 뒤로하고 헤어진다.
오늘의 어려움이 내일의 조국을 미소 짓게 하겠다는 각오로 일한다.
극중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933년 장개석과 협의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1934년 남경에서 한인 특별반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오직 독립운동을 그것도 자유독립을 더불어 남북이 분리되지 않도록 하자는 일념으로 일하는 가운데
1940년 65세의 나이로 중경 임시정부 헌법을 개정하여 주석이 되었고,
1944년 주석으로 재선되었음. 1945년 70세로 해방이 되자 11.23 상해를 거쳐 1진으로 귀국하였고
이듬해는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때 이승만 박사는 남한반의 정부를 구상하여 이끌어 나간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인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북통일된 독립 국가를 부르짖던
그는 74세 되던해 1949년 6.26.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앞서
“나를 쏘려느냐? 쏘아서 독립이 된다면 쏴라.”는 말을 마칠 때 총성이 울리고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비록 갔지만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독립을 위한 지주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의 가족들과 동지들의 도움이 컷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대의 영웅이었고 능력자였던 그가 마지막 빛을 보지 못하고 가신 것이 아쉬웠다.
이렇게 길고 긴 대사를 창으로 춤으로 소화해 낼 생각을 했다는것이 놀랍고
지방에서 많은 춤꾼들과 소리꾼들을 불러모아 팀을 이끈분들이 존경스럽다.
특히 동편제판소리보존회와 사단법인남도문화예술진흥회가 주최하여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준데 대하여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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