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클리대에서 간다라 미술 전공
방대한 자료 섭렵…치밀한 논리 장점
때론 ‘천재’라는 말처럼 편리한 단어도 드물다. 특정분야의 뛰어난 성과나 능력을 보이는 사람을 향해 ‘천재’라 일컬음으로써 자신의 게으름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결실이 어디 있을까. 오히려 천재란 부단한 노력의 퇴적(堆積)을 일컫는 말은 아닐까.
이주형(50)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에겐 오랫동안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뿐 아니라 미국 명문대인 버클리대에서 불과 2년 만에 석사학위를 마쳤으며, 지난 1991년 간다라 불상을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 한 편으로 일약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여기에 30대 초반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니 어쩌면 ‘천재’라는 수식어가 뒤따르는 것도 당연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교수에겐 열정과 도전정신을 갖춘 학자라는 말이 보다 정확할 듯싶다. 그의 논문과 저서들에선 고금의 어떤 학문적 권위에도 주눅 들지 않고 학설 하나하나를 실증적으로 따져 묻는 철저함이 행간마다 묻어난다. 또 정밀한 자료 섭렵 및 치밀한 논의 전개, 여기에 역사적 상상력까지 동원해 지엽적인 부분을 넘어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곤 한다.
지난 2003년 제44회 백상출판상 학술부분 수상자로 『간다라미술』을 펴낸 이 교수를 선정하면서 당시 심사위원들이 “국내 학술서로는 보기 드물게 꼼꼼하고 치밀한 자료 조사를 거쳤다” “참고 문헌과 사진 자료만 보더라도 그 내용이 방대하고 체계적이어서 외국 학술 서적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라고 극찬한 것도 이러한 그의 엄격한 학문세계로부터 비롯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이 책은 간다라 미술의 시원에서 불상의 탄생, 불교미술과 불탑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 외에 논쟁이 될 만한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견해를 뚜렷이 밝히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2004)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열정이 가장 잘 녹아있는 책이다. 그는 21세기 최악의 문명 파괴 사건이라는 바미얀 대불이 힘없이 허물어진 2001년 직후 이 책을 구상해 3년에 걸친 치밀한 현장·문헌 조사를 거쳐 장구한 아프간 문명 전체를 조망하는 ‘인문학적 문명사’를 완성했다. 당시 한국학자로서는 처음으로 포성이 그치지 않는 아프간 지역을 두루 답사했던 그의 학문적 열정과 담대함은 아직도 학계에서 회자될 정도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해 그가 책임편집을 맡아 여러 소장학자들과 함께 펴낸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 유적』도 놀라운 성과로 평가된다. 구법승과 관련된 600여 권의 방대한 문헌기록을 일일이 조사·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 불교유적을 답사해 편찬함으로써 인도 불교미술의 연구 토대를 다졌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그의 저술뿐 아니라 논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교수가 지금까지 쓴 논문은 50여 편. 이 중 올해 발표된 3편을 포함해 20여 편이 영문으로 작성된 논문으로 해외 유명학술지에 실렸다. 이 교수는 이들 많은 논문을 통해 불상에 대한 기원과 역사적 조망에서부터 인도 및 간다라 불상의 온갖 유형, 간다라 불교사원의 조상 봉안 양식에 대한 고찰을 비롯해 한국 고대 불교미술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이들 여러 논문 중 「종교와 미학 사이 : 불상 보기의 종교적 차원과 심미적 차원」(2007)과 「불교미술에서 보는 붓다관: 불상」(2009)도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불상이야말로 경전보다 더 직접적인 불교사상의 표현’이라는 중진 미술사학자의 말이 과연 맞는지, 불상에서 받는 감화가 착각은 아닌지, 나아가 불상이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지 등 불상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형 박사는 간다라 미술 분야에서 가장 흥미로운 글을 쓰는 학자다.”(미국 UCLA 그레고리 쇼펜 교수) “그는 세계 학계가 주목하는 학자로 불교교리와 언어에 모두 밝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간다라미술에서 대승불교의 연원을 밝히는 등 그가 제시한 주장들은 세계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논문 한편 한편이 모두 뛰어나다. 단순히 학문적 기교에 의한 논문이 아니라 문사철의 폭넓은 이해에서 나온 글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교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인문학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남동신 서울대 사학과 교수) “외국 유수의 학술지를 들추다 보면 불교미술과 관련해 흔히 접하게 되는 이름이 바로 ‘Juhyung Rhi’이다. 그는 이미 고대 불교미술 분야에 있어 세계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학자다.”(심재관 금강대 연구교수)
이 교수가 불교미술사를 전공한 것은 부친인 불연 이기영(1922~1996) 선생의 영향이 무엇보다 크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함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 특히 평생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연구하고 정진했던 선친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 학자의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온갖 분야에 두루 밝았던 대학자이자 불교실천가였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학자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또 스스로는 물론 학생들에게 한국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안목과 실력(야성과 창의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노력이 선행될 때 아시아가 세계 학문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까닭이다.
이 교수는 언젠가 연구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간다라미술 및 인도 불교미술에 대한 대작 2편을 영문으로 쓰는 것과 함께 피터 홉커크가 『그레이트 게임』이란 저술을 통해 19세기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펼쳐진 열강의 갈등을 대단히 흥미롭게 펼쳐냈듯 그런 논픽션 한 편을 꼭 남기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꿈이 이뤄질 때 비로소 이 교수를 불연 선생의 아들로 보는 이들보다 불연 선생을 이 교수의 아버지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곧 한국 학계는 물론 우리 불교계를 더욱 무르익게 만드는 길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주형 교수와의 Q&A
질문 |
답변 |
이유 |
닮고 싶은 학자 |
그레고리 쇼펜
로버트 살로몬
조엔너 윌리엄스
이기영 선생 |
상상력과 자신감
치밀한 자료 연구와 논의 전개
양심적이고 과장 없는 학풍
진리에 대한 열정 |
존경하는 인물 |
달라이라마
경봉 스님 |
겸손하고 평화로운 모습 인상적
온화한 미소와 격려를 잊지 못함 |
꼭 읽혔으면 하는 저술 |
아프가니스탄, 읽어버린 문명 |
가장 정성들여 썼음 |
권하고 싶은 책 |
유마경 |
대승의 요체를 정연하고
감동적으로 서술 |
늘 새기는 구절 |
법성게 |
내용이 좋고 염송하기에도 좋음 |
가까운 학문 도반 |
안성두, 남동신 |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연구에
도움도 많이 받음 |
꼭 하고 싶은 일 |
간다라미술, 인도불교미술 저술 |
연구사에 오래 남을 대작 2편을
영문으로 쓰는 일 |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041호 [2010년 03월 23일 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