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44) 지록위마(指鹿爲馬)

이찬조 2020. 1. 28. 08:21

열국지 (44) 지록위마(指鹿爲馬)

 

조고는 아첨하는 데는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위인이었다. 그 덕택에 시황제 때에는 일개 내시로서 시황제를 등에 업고, 천하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러 왔었고, 이세 황제가 등극한 뒤에는 놀랍게도 승상의 자리를 타고 앉아 천하를 호령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환관에서 승상으로! 불알조차 없는 내시(內侍)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고는 <그 있을 수 없는 일>을 실현시키고야 말았다. 이 한가지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조고의 간지(奸智)가 얼마나 비상한 것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승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승상이 되었으므로 세상에는 비난이 없을 수 없었다.

조고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비난이었다. 그러기에 조고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은 엉뚱한 죄를 뒤집어씌워 삼족을 몰살시켜 버리곤하였다.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은 무려 3,4천 명.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조정의 대부들조차 조고 앞에서는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항우에게 참패한 진나라의 대장군 장한은 함곡관(函谷關)에 진을 치고 <지원군을 급히 보내 달라>는 장계문을 함양에 성화같이 올렸다.

<초장 항우가 20만 군사로 머지않아 장하를 건너 함양으로 쳐들어 올 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들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아 군사가 자꾸만 불어 가고 있으므로, 저들을 함곡관에서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판이니, 시급히 지원군을 보내주시기 바라옵니다.>

이렇게 보내 온 장한의 장계는 위급한 상황을 절절히 담고 있었다.

그러나 조고는 이러한 장계를 일소에 붙여 버린 채 황제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장한이란 자가 무슨 꿍꿍이속으로 함양에 있는 군사를 모조리 자기한테로 보내 달라는 것일까?

그 의중(意中)이 매우 불온하구나 ....)

조고는 자기 이외에는 그 누구도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 왔다. 대장군 장한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이렇게 권력 장악에만 눈이 어두운 조고에게는 국가의 흥망 같은 것은 애시당초 염두에 없었던 것이었다.

조정의 대부들은 꼬리를 물고 날라오는 장한의 장계문을 읽어 보고 모두들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조고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워서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그런 사실을 직접 품고(稟告)하지는 못했다. 내시 출신인 조고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벼슬이 아무리 높기로 불알도 없는 병신을 누가 존경할 것인가.

그러기에 조고는 승상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불안하여,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숙청해 버렸다.

(나에게 심복(心服)하는 놈이 아무도 없으니, 나는 저들을 권력으로 굴복시키리라. 힘으로 굴복시키면, 그 결과는 심복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이것이 조고의 정치철학(政治哲學)이었고, 그 철학을 현실에 옮겨 놓은 것이 <피의 숙청>이었다.

또 이것은 조고가 일찍이 진시황에게서 배운 정치 철학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진나라 조정에 가득찬 만조백관들 모두는 하나같이 조고에게 절대 복종하는 무리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조고는 사람을 등용할 때면, 낱알을 키로 까불듯이 까불고 체로 쳐서, 자기에게 절대 복종할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감투를 씌워 주지 않았다. 인사행정에 이처럼 용의주도한 조고였었다.

조고는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한번은 그들의 속마음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조고가 황제를 모시고 만조백관들과 조회(朝會)를 끝낸 직후의 일이었다.

조고는 황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폐하! 폐하께서 사냥을 좋아하시옵기에, 신이 좋은 말을 한필 구해 놓았습니다. 사냥하실 때에는 그 말을 애용하시도록 하시옵소서."

황제는 평소부터 말을 좋아하던 터이라 조고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경이 짐을 위해 좋은 말을 구해 놓으셨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구려. 그 말을 만조백관들과 함께 구경하고 싶으니, 지금 곧 궁정(宮庭)으로 끌어 오도록 하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황제가 만조백관들과 함께 뜰에 나와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잠시 후에 조고가 몸소 말을 끌고 정원으로 들어선다.

황제를 비롯하여 만조백관들은 조고가 끌고 들어오는 동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조고가 끌고 들어온 동물은 말이 아니고 사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슴은 덩치가 워낙 커서 얼른 보기에는 말과 비슷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어디로 보나 말이 아니고 틀림없는 사슴이었다.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승상! 이 어이 된 일이오? 이것은 말이 아니고 사슴이 아니오?"

그러나 조고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폐하! 이것은 사슴이 아니옵고 말이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만조백관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황제는 조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다시 말했다.

"이 짐승은 누가 보아도 사슴이 분명하오. 이것을 말이라고 보았다면, 승상의 눈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니오?"

그러나 조고는 고집스럽게 다시 주장한다.

"아니옵니다. 이것은 분명히 말이옵니다. 폐하께서 이처럼 의심스러우시다면, 소신이 만조백관들에게 직접 물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어 이렇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 짐승을 사슴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말이라고 여쭈었소. 대부는 어느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시오?"

조고는 자기에 대한 대부들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려고 계획적으로 이번 일을 꾸몄던 것이었다.

대부들은 조고의 낌새를 알아채고 대답하기가 난감하였다. 눈앞에 짐승은 사슴임에 틀림이 없으나,

사실대로 말을 하였다간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맨 먼저 불려나온 대부는 눈 딱 감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짐승은 승상의 말씀대로 사슴이 아니옵고 말이옵니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는 저마다 서슴치 않고 <이 짐승은 사슴이 아니옵고 말이 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들 중에는 양심적인 사람도 없지 않아서 한두 사람만은,

"글쎄올시다. 제가 보기에는 말이 아니옵고 사슴인 것 같사옵니다."

하고 엉거주춤 대답하였다.

"아, 그래? 그러면 내 말이 틀렸다는 말이구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후, 사슴이라고 대답한 대부들은 조고의 명령에 의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을 당하고 말았다.

<지록 위마 (指鹿爲馬 :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긴다)라는 문자는 그때에 생겨난 것이며, 이런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조고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출처] 熱國誌 (44) 指鹿爲馬 |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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