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45) 장한의 공염불
바로 그 무렵 함곡관에 주둔중인 장한은 <지원군을 급히 보내달라>는 장계를 또다시 보내왔다.
그러나 조고는 장한의 장계를 황제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묵살해 버렸다. 대부들도 장한이 보내온
장계가 위급함을 알리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조고가 두려워 감히 입 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세 황제가 낮잠을 자고 있노라니까 십여 명의 궁녀들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우루루 몰려와 황제를 흔들어 깨우며,
"폐하! 큰일났사옵니다. 장한 장군이 대패하여 초나라 군사들이 금명간에 함양으로 쳐들어온다고 하옵니다. 초군이 쳐들어오면 저희들은 모두가 죽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하고 말하며 소리 내어 울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낮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기절초풍 (氣絶―風)을 하였다.
"뭐? 초군이 함양으로 쳐들어온다고?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이세 황제는 크게 당황하여 내관(內官)을 급히 불러 물어 본다.
"초군이 함양으로 쳐들어온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냐?"
내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사오나 그러한 소문이 파다한 것만은 사실이옵나이다."
"초군을 정벌하려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간 장한 장군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
"장한 장군은 초군에게 여지없이 패배하여 본국에 지원군을 십 여 차례나 요청해 왔사오나, 조 승상께서는 장한 장군의 요청을 번번히 묵살해 버리셨다고 하옵니다."
"그럴 리가 있느냐! 장한 장군이 지원군을 요청해 왔다면 승상이 어째서 묵살을 해 버렸겠는냐! "
"그러한 사실은 폐하만 모르고 계실 뿐이지, 세상은 다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이라도 군사를 빨리 보내 주셔서 백성들을 전화(戰火)의 걱정 속에서 구출해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승상을 당장 이 자리에 불러라!"
황제는 처음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와 불안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윽고 조고가 어전으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자 황제는 벼락같은 호통을 질렀다.
"짐은 그대를 믿고 모든 국사를 맡겨 왔었다. 그런데 그대는 변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는데도 짐을 속여 오기만 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능지처참에 가당하도다! 지금이라도 진상을 분명히 고하라! "
금방이라도 목을 쳐 버릴 듯이 무시무시한 진노였다.
그러나 조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차분하게 대답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은 승상으로서 내정(內政)을 담당하여 황제 폐하의 안녕을 전담해 왔사옵고, 외적(外敵)들에 대한 방비는 대장군 장한과 대장 왕리가 전담하기로 되어 있사옵니다. 소신이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혼자서 어찌 내정과 외침을 모두 감당해 낼 수 있으오리까.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특사를 보내시어 외침에 대응치 못 한 장한을 문책하시옵고, 다른 장수로 하여금 초군을 막아내게 하시면, 별로 문제가 없을 줄로 아뢰옵니다.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것이 유언비어(流言蜚語)인 것이옵니다. 게다가 장한은 승상인 저에게는 아무런 기별이 없사온데,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뜬소문만 들으시고 신을 덮어놓고 책망하신다면 소신은 너무도 억울하옵나이다."
"장한 장군이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여러 번 장계를 올렸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오?"
"그런 장계가 있었다면 신이 어찌 폐하 전에 품고하지 않았겠나이까. 폐하께서는 소신의 충성심을 추호도 의심치 말아 주시옵소서."
조고가 눈물로 호소를 하는 바람에 황제의 진노가 어이없이 풀리면서,
"그러면 승상은 자세한 내용을 장한 장군에게 직접 알아보도록 하시오."
(장한이란 놈, 어디 두고 보자.)
조고는 어전을 물러나오면서 장한에 대해 속마음으로 이를 갈았다.
만약 조고에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전방 전황(前方戰況)을 한 번쯤 알아봤어야 옳을 일이다. 그것은 승상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고에게는 애시당초 애국심 같은 것은 한푼 어치도 없었던 데다가, 장한을 오로지 권력 투쟁의 적수(敵手)로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사사 건건 증오심만 솟구쳐 올랐던 것이었다.
조고가 황제에게 호되게 당하고 어전을 물러나고 나온 그 다음날, 함곡관에 있는 장한으로부터 <지원군을 보내 달라>는 장계문이 또다시 날아 올라왔다.
장한은 <승상 조고가 중간에서 훼방을 놓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장계문을 황제에게 직접 보내지 아니하고, 사마흔을 시켜서 조고에게 직접 전달하게 하였다.
사마흔은 승상부(丞相府)로 찾아와 조고의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조고는 만나 주려고 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왔는지, 네가 나가 만나 보아라."
시자(侍者)가 사마흔에게서 장한이 보낸 장계문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조고는 장계문을 읽어 보지도 않고 시자에게 명한다.
"사흘 안으로 대답해 줄 테니, 사마흔은 어디 가지 말고 그때까지 관문(官門) 앞에서 기다리게 하여라!"
사마흔은 어쩔 수 없이 관문 앞에서 사흘 동안을 꼬박 기다렸건만, 그래도 조고에게서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승상이라는 벼슬이 아무리 도도하기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조고가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나오는 데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아서 사마흔은 하인들을 매수하여 까닭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하인들은 사마흔에게 다음과 같은 귀뜸을 해 주는 게 아닌가.
<승상은 장한 장군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머지않아 그에게 패전(敗戰)의 단죄(斷罪)를 내리게 될 것이오. 당신은 지금 그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죽고 싶지 않거든 한시 바삐 여기서 탈출하시오.>
사마흔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전신에 소름이 끼쳐와서, 그 즉시로 함양을 탈출하여 함곡관으로 말을 달렸다.
조고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마흔을 억류해 놓은 그날부터 장한, 동예, 사마흔 등 세 장수의 가족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사마흔을 불러들이려고 하니,
"사마흔은 어젯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조고는 크게 노하여 심복 부하 네 장수를 불러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사마흔을 추격하여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자를 잡아오라! 죽이든 살리든 관계없다!"
조고의 명령을 받은 네 명의 장수들은 사마흔을 잡으려고 함곡관으로 추격의 말을 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맹렬히 추격을 하여도 사마흔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에 이 길로 말을 달려가는 장수를 못 보았나?"
"보았지요. 그대로 달려갔으면 2백 리는 더 갔을 것이오."
백 리쯤 더 달려가서 다시 농부들에게,
"오늘 새벽에 이 길로 말을 타고 도망을 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하고 물어 보니,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보았지요. 그대로 달려갔다면 3백 리는 더 갔을 것이오."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 네 장수가 헛물을 켜고 돌아오자, 조고는 더욱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대궐로 달려 들어가 황제에게 이렇게 품하였다.
"장한과 사마흔은 외지에서 적도(敵徒)들을 토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과 야합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사령관을 다른 사람으로 경질하시고, 장한은 함양으로 불러 올려 참형에 처해 버리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커다란 변란이 생길 것이옵니다."
이세황제는 <장한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말을 듣고, 시퍼렇게 겁을 내며,
"그자가 반역을 도모하다니, 그럴 수가 있는가!"
"장한은 수중에 30만 대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성화같이 졸라대고 있으니, 이것은 반역을 도모하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이까."
황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승상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면 장한 대신에 누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게 좋겠소?"
"대장 조상(趙常)이 적임자인 줄로 아뢰옵니다."
조상은 조고의 조카였다.
조상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조고는 장한에게 보내는 조서(詔書)를 자기 손으로 써 주면서 조상에게 명한다.
"속히 부임하여 장한을 즉시 함양으로 올려 보내라."
한편, 주야겸행으로 함양에서 도망쳐 함곡관으로 돌아온 사마흔은, 함양에서 겪은 조고의 행패에 대하여 장한에게 낱낱이 고해 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한은 눈물을 뿌리며 통탄한다,
"조정에서는 간신이 날뛰고, 일선에서는 강적이 덤벼오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단 말이냐.
아무튼 동예 장군을 불러다가 금후의 대책을 세워 보기로 하자."
동예 장군을 막 불러오려고하는데, 동예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급히 달려 들어오며 말한다.
"사령관님! 큰일 났사옵니다. 조금 전에 함양에서 저를 찾아온 진희(陳希)라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조고는 우리네 가족들을 모조리 옥에 가둬 놓고 ,우리 세 사람을 함양으로 상경하라는 조서를 내려 보냈다고 하옵니다."
"뭐야! 조고가 우리네 가족들을 옥에 가둬 놓고 우리들을 함양으로 불러 올리려고 한다구?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인가?"
장한은 가족들이 조고의 손에 체포가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펄쩍 뛰며 놀랐다.
동예가 대답한다.
"조고는 천하의 간신이어서 일찍이 이사(李斯)의 삼족을 몰살 했듯이, 이번에는 우리들을 함양으로 불러들여 삼족을 멸해 버리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조금 전에 함양에서 진희라는 친구가 급히 망명을 왔으니, 진희를 이 곳에 부르셔서 자세한 사항을 직접 들어 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희가 장한의 앞에 불려 나와 이렇게 말했다.
"조고는 장한 장군을 권력 투쟁의 원수로 생각하고, 장군을 함양으로 불러 올려 숙청해 버릴 음모를 진행 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하니 장군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함양으로 올라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마침 그때, 밖에서 요령(饒鈴)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오더니,
"함양에서 황제폐하의 칙사가 도착하였사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장한이 부랴부랴 달려 나와 영접하는데, 칙사라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조고의 조카인 조상이었다.
조상은 그 자리에서 장한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달해 주었는데, 조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장한 장군은 여러 해 동안 외지에서 적도들을 진압, 토벌하느라고 고생이 너무도 많았소. 장군의 공적이 지대하므로 때를 가려 상을 후하게 내리기로 하겠거니와, 우선 장군의 과로(過勞)를 풀어 주고자 사령관의 직책을 해임하고 대장 조상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니, 장군은 모든 군무를 후임자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오랫 만에 가족들과 함께 편히 쉬도록 하시오.>
장한은 조서를 읽어 보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생사람을 감언 이설로 꾀어 잡아들이려는 조고의 간악한 수법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장한은 즉석에서 조상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이놈! 우선 네놈부터 죽여 버려야 하겠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조상의 목을 장검으로 후려갈기려 하였다.
그러자 사마흔이 급히 달려들며 만류한다.
"쥐새끼 같은 놈의 목을 쳐 본들 칼만 더러워질 뿐이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살려 두었다가 후일에 유용하게 이용하기로 하시지요."
그리고 동예도 그 나름대로 장한에게 고한다.
"이자는 조고의 졸도임이 분명하나, 명색은 <황제의 칙사>이옵니다. 그러므로 이자를 함부로 처단했다가는 엉뚱한 죄명을 뒤집어쓰기가 쉽사옵니다. 그러므로 죽이는 것만은 삼가하셔야합니다."
장한은 그도 그럴 성싶어 조상을 죽이지는 않고 영창(營倉)에 가두어 두기만 하였다.
[출처] 熱國誌 (45) 장한의 空念佛 |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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