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47) 노공과 패공의 관중왕을 향한 약정
장한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항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함양에 알려지자, 승상 조고는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그리하여 대궐로 달려와 이세 황제에게 나무라듯이 품한다.
"폐하! 함곡관을 수비하고 있던 장한이 폐하를 배반하고 항우와 손을 잡았다고 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은 진작부터 그놈의 모반(謨反)이 의심스러워 일찌감치 없애 버리도록 품고하였사온데, 폐하께서 결단을 미루시는 바람에 기어코 큰일을 초래하고야 말았습니다."
장한이 항우에게 투항한 원인은 오로지 조고의 모함 때문이었건만, 간악하기 짝이 없는 조고는 모든 책임을 황제에게 뒤집어씌웠다.
어리석은 이세 황제는 모든 책임이 자기한테 있는 줄로 알고,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짐은 승상만을 믿으니, 모든 일은 승상의 생각대로 해 주시오."
조고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신은 이런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 장한의 가족들을 비밀리에 연금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하니 이제는 그의 가족들을 거리로 끌어내어 대중(大衆)앞에서 목을 잘라 만인의 경계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장한의 가족들을 미리 붙잡아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처사였소."
술과 계집밖에 모르는 이세 황제는 조고의 말이라면 무조건 찬성이었다.
이리하여 조고는 장한의 가족들을 거리로 끌어내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목을 잘라 살해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전군(全軍)에 비상명령을 내려놓았다.
"장한이 초군과 결탁하여 함양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50만 전군은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어라."
진나라가 비록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50만 강군의 위력은 아직도 건재하였다.
한편, 항우에게 투항한 장한은 가족들이 조고의 손에 참살되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목을 놓아 울면서 항우에게 호소했다.
"지금 함곡관을 지키는 진군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런 기회에 함곡관을 거쳐 지금 당장 함양으로 쳐들어가십시다. 저는 제 손으로 진나라를 멸망시켜서, 조고에 대한 원수를 기어코 갚아야 하겠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지금부터 함양으로 쳐들어가 장군의 원수를 갚아 봅시다."
성미가 거친 항우는 오로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적의 정세를 생각치 아니하고 무조건 발군(發軍)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군사 범증이 즉각 제동을 걸고 나선다.
"장군!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항우는 범증의 반대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째서 불가하다는 말씀이오?"
범증이 침착하게 대답한다.
"우리 군사는 오랫동안 외지에 나와 있는 관계로 몹시 피로해진 데다가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한 형편입니다. 게다가 장한 장군이 우리와 손을 잡은 관계로, 진나라 50만 대군이 비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태 입니다. 진나라는 정치적으로 지리멸렬한 상태인 것은 분명하오나, 50만 대군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우리쪽 손실이 클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음 ...., 군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구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이오?"
"회왕(懷王)께서 그동안 수도(首都)를 팽성(彭城)으로 옮기셨지만, 아직 모든 체제가 안정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우리는 일단 팽성으로 돌아가 우리 군사들에게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할 수도 있게 하면서 국기(國基)를 튼튼히 다져 놓은 연후에, 진군에 대한 공략을 추진하는 것이 순서일 줄로 아뢰옵니다."
"기어이 팽성으로 회군해야 할까요?"
"꼭 그래야만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 이유는 ....,?"
"진군은 지금 보복심에 끓어올라서 팽성의 수비가 허술한 것을 알기만 하면 대거에 팽성으로 쳐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우리는 회왕을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신속히 팽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범증의 말은 앞뒤가 정연하였다.
항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소이다. 그러면 함양 공략은 일단 보류하고 우선 팽성으로 돌아가기로 하십시다."
항우가 장한과 그의 군사들까지 모두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오자, 회왕은 맨발로 달려나와 항우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영접하였다.
마침 그 무렵, 남양(南陽)을 공략하던 유방도 회왕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회왕은 항우와 유방의 환도를 크게 기뻐하면서 환영연을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그 자리에는 2백여 명의 장수들이 참석했는데, 그들을 계열별로 분류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유방계(劉邦系): 소하, 번쾌, 조참, 주발, 왕릉, 하후영, 시무, 참합, 노관, 정복, 부관 등등 ...
항우계(項羽系): 범증, 영포, 우영, 종이매, 환초, 정공, 옹치, 장한, 사마흔, 동예, 위표, 장이, 공오 등등..
계열이 뚜렷하게 다른 두 파의 장성들이 하나로 화합해 나가려는데 초군의 기본적인 문제점이 내재해 있었다. 초회왕은 항우와 유방에게 똑같은 축배를 내리며, 두 사람의 전공을 이렇게 치하하였다.
"장남 전선에서 연전연승한 항우 장군의 전공과, 남양 전선에서 승리를 거듭한 유방 장군의 전공은
초국 청사(楚國靑史)에 영원히 빌날 것이오. 그러기에 과인은 두 분에게 똑같은 작위(爵位)를 수여하기로 하겠소. 항우 장군은 <장안후(長安侯)>로 봉하여 <노공(魯公)>이라 부르고 유방 장군은 <무안후(武安侯)>로 봉하여 <패공(沛公)>이라고 부르게 할 것이니, 이 자리에 참석한 만조백관들은 오늘부터 두 장군을 그렇게 불러 주시도록 하오."
항우와 유방으로서는 영광스럽기 짝없는 은총이었다.
이것은 회왕이 두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베풀어 서로 간에 경쟁심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나라를 신속히 발전시켜 나갈 계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와 유방은 다같은 무장이면서도 성품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항우는 용맹하면서도 고집스러워 모든 일을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는 경향이 농후하였고, 유방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한 듯 하면서도 인애심(人愛心)이 강하여 매사를 순조롭게 풀어 나가는 성품이었다.
그러기에 초회왕은 두 사람을 모두 신임하면서도 항우를 대할 때에는 일종의 위압감 같은 것을 느껴 왔었고, 유방을 대할 때에는 마치 자애로운 친구를 만나는 듯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자기 혼자만의 느낌이었을 뿐, 그런 기색을 표면에 나타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우와 유방이 팽성으로 돌아와 몇 달을 지내는 동안에 초나라의 기틀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할 만큼 튼튼하게 다져졌다.
마침 그 무렵, 함양에 밀파되었던 첩자들이 돌아와 진나라의 정세를 이렇게 보고하였다.
"이세 황제는 여전히 주색에 빠져 있고, 조고라는 자는 권력 구축에만 혈안이 되어 사람들은 연방 죽여대는 바람에 국정(國政)은 난마(亂痲)처럼 어지러웠습니다."
항우는 그 보고를 듣고 회왕에게 품한다.
"신은 오래 전부터 도탄 속에 빠져 있는 진나라 백성들을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국정이 몹시 문란하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진나라를 정벌할 때가 아닌가 하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소장에게 진나라를 정벌하라는 군령을 내려주시옵소서."
초회왕은 웃으면서 항우에게 대답했다.
"함양을 공격하겠다는 경의 의견에는 과인도 찬성이오. 그러나 적이 숫자도 많고, 전통적으로 막강하기 때문에 경이 단독으로 쳐들어가기보다는, 패공과 협동하여 양군이 동시에 진군을 공략하는 것이 더욱 유리할 것 같구려."
그러나 항우는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패공과 협동 작전을 펴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소장 혼자서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함양 공략의 전공을 혼자서 차지하려는 항우의 속셈을 회왕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대전쟁을 항우에게만 맡겨버릴 수는 없는 지라, 양두마차 정책(兩頭馬車政策)으로 나라를 운영해 오고 있는 회왕으로서는 유방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얼른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전쟁이니 만큼 싸우려면 총력을 기울여 싸워야 할 것이오. 패공을 불러다가 패공의 의견도 한번 들어 보기로 합시다."
유방이 어전으로 불려 나와 자세한 설명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항우 장군과 소장이 협동 작전을 펴나가면 함양을 함락시키기는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유방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타협적이었다.
초회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항우와 유방에게 명한다.
"그러면 두 장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함양으로 쳐들어 가주시오. 함양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서쪽으로 가는 길이 있소. 어느 편이 멀고 어느 편이 가까운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늙은 대부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동쪽으로 가는 길은 지세(地勢)가 험한 반면에 거리가 약간 가깝사옵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지세가 평이한 반면에 거리가 약간 멀어서 결국은 어디로 가나 비등비등한 거리일 것이옵니다."
회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결정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회왕 자신이 <동(東)과 서(西)>의 두 글짜를 써서 제비를 만들어 가지고,
"패공보다는 노공의 나이가 한 살 더 많으니, 제비는 노공이 먼저 뽑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
초회왕은 두 사람에게 공평을 기하기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윽고 제비를 뽑고 보니, 항우는 <동(東)>으로, 유방은 <서(西)>로 방향이 결정 되었다.
초회왕은 양군이 출정을 하게 되자, 환송연을 성대하게 베풀어 주었다.
환송연이 끝나가자, 회왕은 두 장군의 손을 좌우에 붙잡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두 장군이 장정(長征)의 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과인은 두 분 장군께서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시기를 천지신명께 축원하겠소. 진제(秦帝)의 무도한 학정에 오랫동안 시달려 오고 있는 백성들을 구출해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거룩한 일이겠소. 그런데 과인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중대한 문제 하나를 이 자리에서 두 분에게 밝히고 싶소이다."
예기치 못했던 회왕의 발언에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긴장하였다.
회왕은 무엇 때문인지 오랫동안 심각하게 침묵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나는 초국의 왕족 출신이기는 하지만, 본시는 미천하게 자라온 몸이오. 두 장군은 그러한 나를 왕으로 옹립하여 지극히 대하여 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본시부터 몸이 허약한데다가 경륜조차 부족하여 왕의 구실을 제대로 해 오지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오."
그러자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대왕의 말씀은 너무도 겸손하신 말씀이옵니다. 오늘날 초국의 기틀이 튼튼하게 된 것은 오로지 성은에 입은 덕택임을 거듭 아뢰옵니다."
"두 분의 충성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패망했던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두 분의 공로요. 그래서 두 분이 장도(長途)에 오르는 이 기회에 즈음하여 나는 두 분에게 중대한 약정(約定)을 하나 하고 싶소이다."
"대왕께서 소신들에게 무슨 약정을?"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반문하였다.
"만약 두 분께서 나와의 약정을 꼭 지켜 주시겠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예 말을 아니하겠소이다."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대왕의 분부를 소신들이 어찌 거역할 수가 있으오리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정만은 기필코 지키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안심하고 말하겠소. 두 장군은 지금 동과 서로 나뉘어 함양으로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누가 함양을 먼저 점령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오. 그러므로 함양을 먼저 정벌하는 사람을 <관중왕(關中王)> 으로 삼고, 뒤떨어진 사람은 그냥 신하로 삼기로 합시다. 내가 두 분과 약정하고 싶던 것은 바로 그것이니, 두 분은 그 약정만은 꼭 지켜 주기 바라오."
약정치고는 너무도 거창한 약정이었다.
항우와 유방은 갑자기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저희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왕이 된다면 대왕께서는.....,?"
항우가 그렇게 반문하자 초회왕이 대답한다.
"두 분 중에서 어느 한 분을 왕으로 모시게 되면, 나는 왕위에서 물러나 여생을 한가롭게 살아갈 생각이오."
그러자 유방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저희들은 진나라를 평정하고 나면 대왕을 황제로 받들어 모실 계획이오니, 초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내 문제는 차차로 하고 두 분은 나와의 약정을 준수하겠다는 뜻에서 내 앞에서 의형제(義兄弟)의 결의(結義)를 맺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이리하여 항우와 유방은 초회왕 앞에서 의형제를 맺고 장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신하가 되는냐 하는 거창한 도박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출처] 熱國誌 (47) 魯公과 沛公의 關中王을 향한 約定 |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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