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49) 유비와 장량의 만남
여이기 노인은 본시 명리(名利)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유방에게 <광야군(廣野君)>이라는 작위를 받은 것을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하였다.
(내가 무슨 도움을 드렸다고 나 같은 늙은이에게 이런 과분한 작위를 주신단 말인가. 그러나 일단 작위를 받은 이상, 패공을 위하여 성심껏 도움이 될 일을 찾아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여 노인은 어느 날 유방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함양을 지키고 있는 진군은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패공께서 함양을 함락시키시려면 특출한 지략가(智略家)가 반드시 필요하실 것이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장량(張良)이라는 현사가 계시니, 그분을 모셔 오시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유방이 얼굴에 희색을 띄며 말했다.
"그런 현사가 계시다면 불원천리하고 만나보고 싶습니다. 장량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장량은 나이가 40밖에 안 되지만 천문(天文),지리(地理), 경제(經濟), 군사(軍事) 등등 백방으로 능통하여, 30 전후에는 이미 한(韓)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그 옛날 탕(湯)나라에는 이윤(伊尹)이라는 훌륭한 모사가 있었고, 주(周)나라에는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탁월한 모사가 있었사오나, 제가 알기로는 장량은 이윤이나 태공망보다도 더욱 탁월한 지략가로 알고 있사옵니다. 주공께서 그분을 군사로 모셔 오시면, 함양은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광야군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한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내신 분이라면, 그렇게 훌륭한 분께서 나 같은 사람에게 와 주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이쪽에서 초빙한다고 호락호락 달려올 장량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제가 계교를 써서 주공을 직접 만나 뵙도록 할 테니, 주공께서 그때에 장량에게 웅대한 포부를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장량은 주공의 웅대한 포부에 감동되어 주공을 도와 드리려고 하실 것이옵니다."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께서는 어떤 계략으로 장량을 만나게 해 주시렵니까?"
"주공께서 장량을 만나시려면 우선 한왕(韓王)에게 친서를 써 보내셔야 합니다."
"어떤 내용의 친서를?"
"그 내용은 주공께서 육국(六國)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진나라로 쳐들어가는 중인데, 지금 군량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고 있으니, 한왕께서 동맹국의 우의(友誼)를 생각하시어 군량 5만 석만 도와 달라고 쓰시옵소서. 그러면 한왕은 군량을 도와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장량을 특사로 보내어 용서를 구하게 될 것이옵니다. 주공께서는 그때를 이용해 장량을 설득하시면 되시옵니다."
유방은 여 노인의 절묘한 계략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그리고 유방은 여이기 노인의 계략대로 한왕(韓王)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내었다.
<초나라 정서 대장군(征西大將軍) 패공 유방(沛公劉邦)은 삼가 한왕 전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진나라의 시황(始皇)은 무도하기가 짝이 없어, 생전에 육국(六國)을 강압으로 통합한 데다가, 이세 황제라는 자 또한 잔학하기 짝이 없어서 만천하의 백성들은 지금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사옵니다. 이에 초왕께서는 크게 격분하시어,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해 버리라는 분부를 내 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본인은 지금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중이온데, 많은 군사를 움직이자면 비용과 군량이 한없이 필요하옵니다. 그리하여 인근 각 고을에서 도움을 받아 가며 진군 하고 있기는 하오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오니, 대왕께서 동맹국의 우의로서 군량미를 5만 석만 보내 주시옵소서. 군사적으로 지원을 아니해 주시더라도 군량미만 보내 주시면, 후일에 전후의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게 성찰하시와, 군량만은 꼭 보내 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 초 서군 대장 유방
유방은 이같은 편지를 써서 여 노인을 통하여 한왕에게 직접 전달하게 하였다.
유방의 편지를 받아 본 한왕은, 장량을 비롯한 중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했다.
"우리는 진시황으로 인해 국권을 강탈당해 버렸는데, 초회왕이 대병을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해 주겠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국권회복을 위해 더없이 좋은 일이오. 그런데 초장 유방 장군이 우리더러 군량미를 5만 석만 도와 달라는 편지를 보내 왔구려. 그러나 우리는 여축(餘蓄)이 없어 군량미를 보내 줄 수 없는 실정인데, 그렇다고 전혀 보내 주지 아니하면 신의를 잃게 될 것이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장량이 아뢰는데,
"대왕 전하! 우리가 무슨 비축이 있다고 쌀을 5만석이나 보내 줄 여력이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우선 유방의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하시옵소서. 그러면 수일 후에 소신이 유방 장군을 직접 찾아가, 우리의 궁핍한 사정을 잘 이해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한왕은 몹시 걱정스러워 하면서 장량에게 당부한다.
"잘 알겠소이다. 그러면 경의 말대로 패공의 사신을 극진히 대접할 것이니, 경은 패공을 만나 양국간에 오해가 없도록 십분 노력해 주기 바라오."
그로부터 며칠 후 장량은 여 노인과 함께 유방을 찾아 나섰다.
여 노인은 장량을 유인해 오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뻐, 그 기쁨을 얼굴에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자 장량은 여 노인이 까닭 없이 기뻐하는 태도를 보고 불현듯 의아심이 생겼다.
(이 노인이 까닭 없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를 찾아온 근본 목적은 군량미를 얻어 가려는 데 있지 아니하고, 나를 꾀어 가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장량이 여 노인과 함께 초군 진지(楚軍陳地)에 당도하니, 대장 번쾌가 원문(轅門)까지 마중을 나와 정중하게 맞아들인다.
그리하여 중문으로 들어서려고 하니, 중문 안에서는 유방 자신이 소하, 조참, 등공, 왕릉 등 중신 참모들을 좌우에 대거 거느리고 장량을 몸소 융숭하게 영접해 주는 것이 아닌가.
유방은 장량의 두 손을 반갑게 마주 잡으며,
"선생께서 이처럼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셔서 저로서는 영광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하는 인삿말까지 하는 것이었다.
장량이 수인사를 끝내고 막사에 들어가 마주앉고 보니, 유방의 얼굴은 인덕이 넘쳐 보이는 제왕지상이었고, 그 옆에 나열해 있는 소하, 조참 또한 영웅의 기상들이었다.
(아아, 이 어른이야말로 치국 안민(治國安民) 할 수 있는 진군(眞君)임이 분명하구나! 나의 스승인 황석공(黃石公) 선생께서 일찍이 나에게 <그대는 참된 명군을 도와 이름을 만대에 남기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일이 계셨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신 <참된 명군>이란 바로 이분을 두고 말씀하신 게로다!)
장량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짐짓 시치미를 떼고 유방에게 말했다.
"패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하기 시작하자, 만백성들이 모두가 힘을 모아 패공을 도와 드리고 있는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군량미가 부족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옵는데, 패공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저의 나라에 사신을 보내시어 군량미를 요구하셨사옵니까. 패공께서 그런 요구를 하신 것은, 혹시 저를 유인해 오기 위한 계략이 아니셨는가 싶사옵니다."
그야말로 유방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유방은 핵심을 찔리는 바람에 너무도 놀라워 대답을 못 하고 어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소하가 얼른 대답을 가로맡고 나섰다.
"주공께서 귀국에 군량미를 요구하신 목적은, 실상인즉 선생을 모셔 오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옵니다. 그와는 별도로 선생이 이곳에 왕림하신 목적은 주공을 설득하려는 데 있지 않은가 짐작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주공에게 설득의 말씀을 아니하시는 것은 주공을 <참다운 명군>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옵는지요?"
그야말로 고답적인 질문에 고답적인 대답이었다. 장량과 소하는 모두가 지낭(智囊: 꾀 주머니) 들인지라, 서로 간에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장량은 크게 웃으며 소하에게 말한다.
"내 오늘 선생 같은 지낭을 만나 매우 기쁘오이다."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실상인즉, 저희 참모진은 주공께서 선생 같은 만고의 지낭을 얻으시게 된 것이 무한히 기쁘옵니다."
장량은 소하의 능란한 변론에 감탄해 마지않으며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러자 소하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만약 선생께서 주공을 도와 진나라를 정벌하신다면, 한나라는 이렇다 할 노력도 아니 하고 원수를 갚는 셈이니, 그 어찌 선생의 공로가 지대하다고 아니 할 수 있으오리까. 바라옵건대 선생은 패공께서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장량은 그 말을 듣자 소하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귀공께서 나의 심중을 이처럼 꿰뚫어 보고 계신 줄은 몰랐소이다. 터놓고 말씀드리거니와, 나의 조국인 한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은 나의 한평생의 소원입니다. 따라서 진나라를 정벌하는 패공을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은 나 역시 간절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나라에 매여 있는 몸이니, 대왕전에 자세한 사정을 여쭈어 허락을 받기 전에는 단독으로 대답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선생을 모시고 나 자신이 막료들과 함께 수일 안으로 한왕을 직접 찾아뵙기로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유방은 여이기, 소하, 번쾌 등의 막료들을 거느리고 장량과 함께 한왕을 직접 방문하였다.
한왕은 주연을 베풀어 유방을 극진히 환대하면서 말했다.
"패공께서 대의의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하시면서 군량미 5만 석을 보내 달라고 말씀하셨으나, 저의 나라는 재정이 워낙 궁핍하여 5만 석을 공출할 능력이 없기에, 장량을 보내 패공의 양해를 구했던 것이니 이 점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유방이 웃으면서 말한다.
"귀국의 사정으로 군량미를 도와주시기가 어려우시다면, 굳이 무리한 요구를 아니 하겠습니다. 하오나 전쟁을 치루는데 있어 필요한 저의 소청 한 가지만은 꼭 좀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옵고, 진나라를 정벌하는 동안 장량선생을 저희들에게 빌려 주셨으면 하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크게 당황해 하였다.
"패공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소이다. 그러나 자방(子房: 장량의 아호)은 우리나라의 국정을 전담하고 있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중신이니, 이를 어쩌면 좋사오리까."
한왕은 난색을 표명하며 완곡히 거절하는 태도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장량은 한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중신이어서, 모든 국정은 그의 보필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방은 한왕이 장량을 보내 주지 않으려는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나라의 조정에는 장량 이외에는 인물다운 인물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방이 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장량이야 말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유방은 한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금 간곡하게 요청한다.
"대왕 전하의 신금(宸襟)은 충분히 헤아려 모시옵니다. 그러나 진나라는 병력도 많고 전투 경험도 많은 강군을 가지고 있으므로 장량 선생 같은 탁월한 지략을 가진 분이 계셔야만 진나라를 정복할 수가 있사옵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진나라를 정복해 버리지 못한다면, 초한 양국(楚韓兩國)은 진나라의 속국 신세를 영원히 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옵니다."
"음 ......,"
"장량 선생을 빌려 주셔서 국권을 회복하시느냐, 그렇지 않으면 장량 선생을 슬하에 붙들어 두심으로써 영원히 진나라의 속국이 되느냐,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처해 있사옵니다. 대왕께서는 그 점을 다시 한 번 고려해 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유방이 이렇듯 심각하게 나오자 한왕은 몸시 난처한 듯 말한다.
"패공의 말씀을 들어 보면 그렇기도 하구려."
그리고 이번에는 장량에게 묻는다.
"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시오 ?"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패공의 말씀대로 진나라를 정벌하려면 모든 나라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소신은 대왕 전하께서 윤허를 내리시기 전에는 촌보도 움직이지 아니하겠습니다."
"경을 보내자니 나라 안이 텅 비는 것만 같고, 경을 붙잡아 두자니 원수를 갚을 수가 없는 형편이고 ...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구려."
그리고 이번에는 유방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만약 자방을 모셔 가면 언제쯤 돌려보내 주시겠소?"
유방이 맹세하듯 대답한다."
"진나라를 정벌하고 나면 장량 선생을 그날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것만은 굳게 믿어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천하의 대의를 위해 어찌 나만의 욕심만 고집할 수 있으리오. 자방은 수고스러운 대로 패공을 도와 국원(國怨)을 시원스럽게 풀고 돌아오시기 바라오."
이리하여 장량은 유방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유방은 그날부터 장량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장량을 깍듯이 선생으로 모셨다.
어느 날, 장량은 유방의 소청에 따라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강론해 준 일이 있었는데, 유방은 까다로운 병법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해 주었다.
그 총명이 너무도 놀라운 나머지 장량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탄복하였다.
(과연 이 분은 하늘이 내리신 <참다운 명군>이로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듯 두뇌가 명석하고 도량이 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략의 대가인 장량으로서도 패공 유방에게는 머리가 절로 수그려졌던 것이다.
[출처] 熱國誌 (49) 劉備와 張良의 만남 |작성자 소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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