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열국지 (50) 무혈점령

이찬조 2020. 2. 3. 12:31

열국지 (50) 무혈점령

 

초 서군 대장군 패공 유방은 가는 곳마다 인덕을 베풀고 현사들을 규합하면서, 함양을 향해 순조로운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면 초 동군 대장군 노공 항우의 동태는 어떠했던가.

항우는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관계로 적을 만나기만 하면 불문곡직(不問曲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자비하게 싸워서 진나라의 성채(城砦)를 연달아 점령해 가고 있었다.

항우와 유방의 적을 공략하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유방은 싸우는 대신에 회유책(懷柔策)으로 무혈점령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고, 항우는 적을 만나기만 하면 무자비한 공격 일변도의 전술로써

점령지를 초토화(焦土化) 시켜버렸다. 항우가 이처럼 무자비한 전법을 쓰는 데는 뚜렸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관중왕(關中王)으로 봉한다>는 초회왕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항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방보다 먼저 함양을 정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적진을 피바다, 불바다로 만들자니, 성안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비참하게 희생되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항우가 성을 하나 점령하고 나면, 백성들은 협조를 하기는커녕 공포에 떨며 서로 도망치기에 바빴었다.

항우의 수법이 너무도 잔혹하므로 군사 범증이 이렇게 간한 일도 있었다.

"성을 빼앗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오나, 이후에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가급적이면 초토화 작전은 쓰지 않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범증의 말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백성들의 희생 없이 어떻게 성을 공략한단 말이오?"

"성을 얻고 민심을 잃으면, 장차 그들을 어떻게 다스려 나간단 말입니까?"

"모르는 소리 그만 하오. 백성이란 힘으로 눌러 버리면 그만인 것이오. 민심을 얻고 잃는 것은 차후의 일이란 말입니다."

범증은 항우의 무지에 너무도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혼자 탄식하였다.

(아아, 나는 역시 주인을 잘못 선택하였구나.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인덕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천하를 다스려 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유방은 어디까지나 인덕이 넘치는 덕장(德將)으로 보였었는데, 항우는 천하만사를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유방을 이겨낼 수가 있을 것인가!)

범증은 주인을 잘못 선택한 것이 자꾸만 뉘우쳐졌다.

그러나 일단 주종 관계(主從關係)를 맺어 버렸으므로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항우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할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항우는 오로지 무력으로 적을 공략하기 때문에 눈앞의 전과는 대단한 듯이 보였지만, 그 대신 전투를 수없이 반복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무자비하게 성을 빼앗긴 적군들이 이곳저곳에서 힘을 모아 산발적인 항전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항우가 싸우면서 전진하는 속도는, 유방이 선무 공작으로 인덕을 베풀면서 전진하는 속도보다 오히려 더딘 편이었다.

유방이 무혈점령을 계속하면서 무관(武關) 가까운 곳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었다.

산중에서 홀연 정체불명의 장수 하나가 말을 달려오면서, 유방의 군사들을 향하여,

"패공에게 여쭐 말씀이 있으니 패공을 만나 뵙게 해 주시오."

하고 큰소리로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선봉장이 이 광경을 보고 큰소리로 분노한다.

"너는 어떤 놈이기에 감히 주공을 만나 뵙겠다는 것이냐. 여봐라! 부관(傅寬), 부필(傅弼)은 당장 달려나가 저놈의 목을 베어 오너라."

부관과 부필이 정체불명의 장수에게 달려나갔다.

그리하여 그들 간에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부관과 부필은 그의 목을 베어 오기는커녕, 10여 합을 싸우더니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장량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앞으로 나서며 정체불명의 장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패공을 만나 뵙겠다고 하며, 그대의 성명은 무엇인가?"

"패공을 직접 만나 뵙기 전에는 나의 이름과 용무를 말하지 않겠소. 여러 말 말고 패공을 만나게 해 주시오."

번쾌가 그 말을 듣고 노하며,

"이 돼먹지 않은 놈아! 네놈이 뭐관데 감히 패공을 만나겠다는 것이냐?"

하고 고함을 지르며 장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이번에는 번쾌와 싸움이 시작되었다.

번쾌는 소문난 맹장이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장수의 무술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20여 합을 겨뤘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유방이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 사람>의 칼 쓰는 법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하여 말을 달려 나오며 명한다.

"번쾌 장군은 싸움을 멈추시오."

그리고 정체불명의 장수에게 말했다.

"내가 패공이다. 그대는 어떤 일로 나를 만나려고 하는가?"

정체불명의 장수는 그제서야 창검을 거두고 말에서 뛰어내려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소장은 진작부터 명군(明君)을 찾아 헤매던 중이옵니다. 패공께서 함양을 공략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소장을 부하로 거두어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며,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던 사람인지 정체를 소상히 밝혀라."

"소장의 이름은 관영(灌英)이라 하옵니다. 본시는 무가(武家)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남부럽지 않은 무예(武藝)를 연마해 왔습니다."

유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번쾌 장군과 겨루는 광경을 보고, 무예가 비상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생계가 어려워 지금은 자관(紫關)을 넘나들며 장사를 해먹고 있는 중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적잖이 실망했다.

"장사를 해먹고 있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나를 만나러 왔단 말인가?"

"제 말씀을 조금만 더 들어주시옵소서..., 장사를 해먹느라고 자관을 자주 넘나들다 보니, 그 깊은 산중에 백여 명의 산적(山賊)들이 은거하면서 장사꾼들을 몹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서 산적 놈들을 모조리 퇴치해 버렸더니, 산적에게 고통을 받아 오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저를 의병 대장(義兵大將)으로 받들어 올려서, 지금은 3천여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는 의병 대장이 되었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장사를 해먹던 사람이 산적을 퇴치해 준 공로로 일약 의병 대장이 되었다니, 대단한 일이네.

그 한 가지 만으로도 그대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네."

"저는 본래가 무가 출신인 데다가 이제는 의병 대장이라는 칭호까지 얻고 보니, 그 전 하고는 다르게 ,마음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인가?"

"이왕 의병 대장이 된 이상에는 불의를 쳐서 세상을 바로잡아 보고 싶사온데, 때마침 패공께서 백성들의 환대를 받으시며 함양으로 쳐들어가신다고 하기에, 저도 패공의 휘하가 되고자 찾아 온 것이옵니다."

"그대가 그처럼 갸륵한 뜻을 가지고 찾아 왔다면, 내 어찌 그대를 마다고 하겠나. 오늘부터라도 생사를 나와 함께 하기로 하세! "

"관후하신 은공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게 되면 함양을 공략하는 데 제일의 요새(要塞)인 무관(武關)이 있사옵니다. 제가 다행히 그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사오니, 무관 공략에 저를 선봉장으로 써 주시면 저는 목숨을 걸고 무관을 함락시키기로 하겠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장량과 상의하여 관영을 무관 공략의 선봉장으로 기용하기로 하였다.

[출처] 熱國誌 (50) 무혈점령 |작성자 소주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