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9)> 개국 7 - 역성혁명
이성계파와 정몽주파의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던 와중에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정몽주는 이를 하늘이 준 기회로 보고, 정도전, 남은 등을 구속하고 참수 직전까지 몰게 되었으며, 한 번 빈틈이 보이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정몽주의 공세에 난공불락이던 이성계의 권력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이는 이성계에겐 또 하나의 날개, 다섯째 아들 25세의 젊은 피 이방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원은 일반적인 무인의 아들과 달리 문과 과거에 합격한 문인에 속하면서도, 명분에 발이 묶인 다른 문인들과는 존재의 차원을 달리하는 담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방원은 “필요하면 먼저 행하고, 명분은 그 후에 만드는 것이다”라는 과단성을 갖춘 자로,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이방원의 이런 성격을 과소평가한 것이 바로 이들 3인이 겪게 되는엄청난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피 이방원은 몸져누운 이성계를 개경까지 데리고 와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정도전 등의 참수를 일시 정지시키는 한편,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며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한편, 정몽주는 이방원의 이런 계책도 모른 채 누워 있는 이성계를 문병한다는 명분으로 이성계를 찾아 왔으니, 이는 이성계가 무리수를 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겠으나, 그 아들인 이방원의 됨됨이를 간과한 대실수였습니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가던 당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수하를 시켜 보란 듯이 척살을 해버리니 이 때 정몽주의 나이 56세였습니다. 이방원은 이일을 계기로 이성계의 눈 밖에 나게 되었으나, 그 대신에 정도전 등과 어깨를 겨룰 만한 거물급으로 조정과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더 이상 이성계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은 사라졌고, 예정된 수순대로 공양왕은 폐위되었으며, 이성계는 만조백관의 주청을 받고, 몇 번을 사양하는 척하다가 드디어 보위에 오르게 되니(56세), 정도전(50세)과 결의를 다진 때로부터 9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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