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18)> 태종 4- 양녕과 충령

이찬조 2021. 3. 20. 19:24

<조선왕조실록(18)> 태종 4
- 양녕과 충령

태종은 정비 민씨와의 사이에서
양녕, 효령, 충녕, 성령 이렇게 아들 4명을 두었습니다. 태종이 중전 민씨 일가를 몰락시키고 많은 공신들을 처치한 이유는 오로지 미래 군주인 세자 양녕대군이었는데, 양녕대군의 탈선이 만만찮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양녕은 어린 시절부터 빡빡한 군주교육을 따라가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열일곱에 이르러서는 최초로 기생을 불러 통하는 등 여색을 밝히기 시작하였습니다.


* 폐위되는 양녕과 세자로 책봉되는 충녕

  태종은 재위기간 중 네 번에 걸쳐 선위파동을 일으킨다. 첫 번째 선위파동은 1406년에 일어났는데 이때 양녕의 나이 불과 13세였다. 어린 양녕을 대상으로 태종이 선위 표명을 한 것은 표면적으론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심으론 민무구 형제를 제거하려는 포석이었다. 제1차 선위파동 때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탄핵되자,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하고 슬그머니 선위 문제를 접은 것은 태종의 내심을 잘 드러낸 일이라 하겠다.

  그 이후에도 태종의 선위 표명은 세 번이나 계속된다. 태종의 선위 표명이 있을 때마다 조정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고, 그것은 민무구 형제의 죽음과 세자 폐출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태종이 마흔도 안 된 시절부터 계속해서 선위 표명을 한 것은 원경왕후 민씨와 민무구 형제로 대표되는 외척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표면적으론 몸이 노쇠하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민무구 형제의 권력 팽창을 견제하고 국가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태종은 왕권 행사에 저해 요소가 되는 외척 세력을 약화시킨 뒤, 자신이 일찍 상왕으로 물러앉아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권을 보호하고 왕이 정사를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권력의 마지막 보루인 군정(軍政)의 안정에 주력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의 이런 계획은 자신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한 측면도 있었다. 자신이 갑자기 죽는다 하더라도 왕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지만 선위 문제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사실 선위파동을 일으키면서 태종은 내심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는 근본적으로 태종이 양녕을 신뢰하지 않았던 면도 있지만, 양녕의 왕위 계승이 자칫 외척들의 발호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양녕은 어린 시절에 외가에서 자란 탓에 외삼촌들과 매우 친밀했다. 따라서 양녕이 세자가 된 뒤로 민무구 형제들이 거만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들이 세자의 안위를 위해 효령과 충녕 등의 대군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태종의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다 많은 대신들까지 민씨 형제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태종의 선위파동은 그런 민씨 형제들과 세자를 떼어놓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녕은 그런 태종의 우려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더구나 양녕은 제왕 수업엔 관심이 없고 엉뚱한 짓만 하였고, 그로 인해 태종은 세자에 대해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세 번째 선위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양녕이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4년 만에 폐위된 것은 순전히 태종의 뜻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 이도가 올랐다. 이후 태종은 네 번째 선위파동을 일으켜 기어코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기에 이른다.

  양녕의 폐세자 사건과 관련하여 야사에는 실록의 기록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때부터 미치광이짓을 했다는 말도 있으나 이는 야사의 추론일 뿐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시간에도 동궁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 심지어 여염집 처녀를 납치해 강간하는가 하면, 기생을 몰래 동궁으로 들여 아이를 배게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양녕은 애초에 제왕이 될 자질이 없는 인물이었고, 태종은 일찍 그 점을 간파했지만 차마 폐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세자의 패륜 행각이 극을 향해 치닫자, 결국 그를 내쫓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