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43)> 중종 2-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이찬조 2021. 4. 6. 04:56

<조선왕조실록(43)> 중종 2
-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 형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법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진성대군은 왕이 되었으나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중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습니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마지 않으니 따르노라”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전망을 갖고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은 연산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개나 소나 공신이니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 차지가 되었으며, 불안한 정국에 임금이 허약하니 관직사회의 기강 해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령들은 돈을 주고 관직을 샀으니 그 몇 곱절을 뽑으려 백성의 등골에 빨대를 꽂았고, 어사를 파견하여 적발하고 처벌을 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가뭄, 홍수, 우박에 지진까지 찾아오니, 고향을 떠나 떼도적이 되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한편 기세가 왕 못지않던 반정공신들 중 박원종 등 반정 실세들이 중종 7년에 이르러 대부분 죽게 되자, 힘의 공백이 생겼고. 중종은 비로소 왕 노릇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이 자가 바로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수제자입니다.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았는데, 젊은 조광조는 두 번의 사화와 스승의 죽음 그리고 중종반정을 목도하면서, "임금과 신하가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근본을 바로세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조광조는 29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성균관 생도들 역시 다른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본질을 공부하고 실천하려하기보다는 보신과 출세와 요령취득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연산 시대를 거치면서 온 나라가 이 모양이 된 것이지요

조광조는 처음부터 의관, 자세, 언행 등 모든 면에서 성리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했고, 처음에는 비웃던 자들도 조광조의 반듯함이 진정성 있게 지속되자 자연스럽게 조광조를 주목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반듯한 자세, 성리학의 깊은 이해와 원칙 견지, 유려한 말솜씨, 진정성에 성실함까지
임금과 함께 하는 경연장은 곧바로 조광조의 독무대가 되고 맙니다.

난세에 왕노릇은 몇곱절 하기 힘들었을텐데... 더군다나 어린 나이에~
조광조의 등장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