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44)> 중종 3- 조광조의 개혁

이찬조 2021. 4. 6. 04:56

<조선왕조실록(44)> 중종 3
- 조광조의 개혁

중종은 조광조의 학식과 됨됨이에 반해 조광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되었고, 급기야 과거 급제 2년도 되지 않아 조광조를 홍문관의 수장인 부제학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울러 조광조가 몰고 온 바람은 조정 안팎의 젊은 선비들을 매료시켜 이들 역시 조광조를 진심으로 따르는 지경이 되었고, 대신들도 가급적 조광조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광조는 중종과 선비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몽주의 신원을 회복하여 문묘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써 조광조가 사림의 정통 학맥을 잇는 선비임을 대외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이어서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가 시나 문장, 즉 사장(詞章)에 능한 사람을 뽑을 뿐 성리학의 본질에 부합하고 덕이 있는 자를 뽑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로 현량과의 실시를 강력 주장하였고, 중종은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훈구파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현량과 : 중국 한나라 때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떠 만든 것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에 의해 대책(對策) 만을 시험보고 채용하는 제도

또한 조광조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생겼을 때 일월성신에게 도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관청인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 주장하여 이를 관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종이 반대 의사를 여러 번 밝힌 일로써, 이로 인해 중종과의 유대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는데, 조광조는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조광조 세력은 성리학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강한 목적의식에 따라 훈구파들을 사장, 즉 시나 문장만을 일삼는 소인배, 구세력이라는 이유로 탄핵해 유배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속도조절보다는 가속 페달을 더 깊숙이 밟았는데, 이로 인해 훈구파들의 불만이 소리 없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것들 역시 소인배들의 전형적 형태로만 여겼을 뿐 그 위험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중종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여러 개혁조치를 강행하면서 조정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광조 세력은 성리학의 이상을 따르는 철인군주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신하와 백성이 될 수 있는 제도와 현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어느 정도의 가시적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며, 이와 같은 조광조의 노력이 더 계속된다면 조광조의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꿈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 것으로 볼 여지도 상당했습니다.

암튼 중종의 신임과 조정 안팎의 지원을 바탕으로 힘을 최대한 비축한 조광조 세력은 드디어 이 시대의 가장 예민한 부분에 칼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중종반정 때의 정국공신 117명중 무려 76명에 대해 이들이 연산군의 충신인데다 아무런 공도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이었습니다.

조광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현량과 실시
음~~기존세력에 크게대립하거나, 대항하게되면 , 되려 다치는경우가 많은듯~~이것이 지도자로써 가장 큰 고난중 하난데~~내가 다치던, 상대가 다치던,필시 짚고넘어야할 산이란건 분명하다. 탕평책을 써도 그시대만 조용하지, 결국은 왕도 독배를 마시는것과 다르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