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45)> 중종 4- 기묘사화(己卯士禍)(1)

이찬조 2021. 4. 6. 04:58

<조선왕조실록(45)> 중종 4
- 기묘사화(己卯士禍)(1)

조광조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반정 자체를 역적질로 본다는 심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 세력은 과도한 공신 지정에 따른 폐해 수정이라는 명분과 중종의 지지를 믿고 이를 과감히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중종은 조광조 세력의 위와 같은 대규모 위훈삭제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조광조 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중종은 결국 본인의 의지와 달리,다른 신료들의 지지까지 입은 조광조의 주장을 본심에 반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환영하였지만 중종은 언제부터인가 조광조가 부담스러웠고,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세력이 임금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과격한 노선을 추구한 조광조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세력을 내치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입니다.

※ 4대사화 : 무오사화(연산, 조의제문), 갑자사화(연산, 어미 복수),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
중종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을 내친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인데, 이를 재구성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남곤은 성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연산 치하에서 벼슬을 하다 갑자사화 때 귀양을 갔던 사람으로서, 중종조에 이르러 탁월한 정치감각과 문장으로 신진세력의 리더로 꼽혔으나, 조광조의 출현으로 빛이 바랬고 급기야 이들로부터 구세력으로 몰려 입지를 잃고 말았습니다.

남곤은 이에 실망하지 않고 역시 조광조 세력으로부터 구세력, 소인배로 몰려 탄핵을 당한 동갑내기 심정, 그리고 정국공신의 상징으로서 조광조의 76인 위훈삭제로 인해 목에 칼이 들어왔다고 느낄 정도로 불안감을 갖고 있는 홍경주와 함께 의기투합하였습니다.

이들은 중종이 조광조 세력의 과도한 밀어붙이기식 개혁추진과 자신에 대한 지나친 압박 그리고 조광조의 높은 인기에 불안감과 시기심을 갖고 있고, 아울러 위훈삭제로 밀려난 공신들이 작당하여 반정이라도 일으킬까 크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이를 활용해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작심하였습니다.

조광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조선시대 안타까운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조광조. 언제나 세상은 돌게 되어있고, 역사는 반복되고 오르긴 힘들지만 내려 가는 건 한순간, 씁쓸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과도한 칼질해 대다가 주인 입맛에 맞지 않아 짤린 요리사랄까~

중종~이 양반도 그릇이 간장종지~
에휴~ 조광조가 10년만 더 살았어면, 조선이 훨씬 더 발전했을텐데~

명분이 서고 아무리 옳은 일이라해도 내가 최고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항상 반대세력과 분란을 키우게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