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41)> 연산군일기 7- 패악의 절정 그리고 몰락의 시작

이찬조 2021. 4. 1. 20:28

<조선왕조실록(41)> 연산군일기 7
- 패악의 절정 그리고 몰락의 시작

갑자사화가 시작된지 70일이 지난 후 연산은 이만하면 백성과 신하들이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는 매우 조심스런 대신들의 간언에, “10년은 풍속을 바로잡아야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대신들을 아연실색하게 하였습니다.

연산의 자칭 개혁은 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졌고 잔혹해졌습니다. 연산은 죄인을 잡아올 때 손바닥을 꿰어 끌고 오게도 하고, 배를 가르고 뼈를 바르는 광인과도 같은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또한 연산은 어미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고, 조참에 백관을 꿇어앉도록 하고, 하급 문신과 대간들을 자신의 가마를 메게 하는 등 하는 짓이 점점 해괴해졌습니다.
조선의 태종이나 세조 그리고 중국의 예에서 보면 신하들에게 매우 가혹했지만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어찌되었든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점에 있으나, 연산에게는 가혹한 권력만이 있을 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설계가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백성들의 땅을 빼앗고 이유 없이 죽이는 등의 가혹한 행위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산은 점점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흥청망청(興淸亡淸)”입니다.(지면 관계상 각자 찾아보기)

그런데, 연산은 과연 미친 것일까요? 아니면 <연산군 일기>에 기재된 내용이 과장된 것일 뿐 실제는 이와 같지 않았을까요?

연산이 미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른 야사에도 연산의 위와 같은 행위가 많이 나오고 역사가들의 이견도 없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이 있다 하더라도, 연산이 수백 번 죽어도 마땅한 패악을 저지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생각컨대, 연산은 가혹한 통치만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한 왕권을 유지시켜주는 길이라고 믿었고, 연산은 포악한 권력을 아무런 견제 없이 휘두르다 스스로 휘두르는 권력이라는 괴물에 이성이 마비되어 사실상 미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뭏든 연산은 자신을 견제하는 모든 장치가 해제되자 더욱 향락의 길로 빠져들었고, 급기야 신하들의 부인까지 수시로 탐하고 나들이하는 길 위에서 교합을 하는 등 연산의 타락은 끝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임금이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곤 없다”라는 익명의 투서가 전해지고,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옛 글에도 있는 것이다. 가엾은 백성들아 나의 의병을 따르라”라는 익명서 등이 붙으니, 이는 연산이 몰락할 필연의 조짐이었습니다.

연산은 이런 조짐에 내심 큰 두려움을 느꼈으나, 이러한 두려움이 오히려 연산을 더욱 광폭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즈음 연산을 오랫동안 모셨던 내시 처선이 연산에게 충언을 하다 팔 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두 가지 걱정과 근심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는 연산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요, 둘은 어디선가 정변이 일어나면 자신들도 연산과 함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산의 광폭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기에, 오로지 생존을 위한 정변의 기운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이제 누군가 그 팽팽한 줄에 칼을 대기만 한다면, 정변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즈음 연산을 몰아내는 반정을 구체화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박원종입니다.

연산의 운명이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도가 지나치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게 당연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