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58)> 선조 6
- 침략, 그리고 조선판 킬링필드
선조 25년인 1592년 1월 히데요시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수십만 대군이 나고야로 집결했습니다. 이 소식은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지만, 조정은 이 소식을 무시했습니다.
그해 4. 13. 조선은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왜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으나, 상륙 저지를 위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최정예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1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 제2선봉대 가토 기요마사군이 속속 부산포로 상륙했고, 부산진과 동래진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조선군이 왜군과 처음 대적한곳은 부산 진성, 첨사 정발 이하 군민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성은 곧 함락되고, 성안의 백성 3,000명이 살육당하였습니다.
곧이어 동래산성에서는 송상현 등이 죽기로 싸우다 모두 전사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동래성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 명의 병력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송상현은 부산진에 있던 왜관의 왜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왜인들의 이상징후를 느끼고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고 전력에 차이가 나 이런 준비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송상현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백성들까지 합세해 왜군과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무참히 패배했고,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한 뒤, 여자, 어린아이 등을 가릴 것 없이 5천의 관민을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최근의 발굴과 연구에 의해, 다음의 충격적인 사실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왜군은 단순히 전투 과정에서 동래성의 백성과 관군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전투가 모두 끝난 후 5세 정도의 유아의 머리에 지근 거리에서 조총 조준사격을 하고, 주저앉혀진 20대 여성의 두개골을 위에서 수차례 칼로 내려치는 등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으로 어린 아이, 여성 등을 포함한 무수한 민간인들을 대놓고 학살한 증거들이 속속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학살은 단순히 “저항하면 다 죽인다”는 시위를 하기 위한 목적에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군은 왜란 내내 조선 군민에 대한 학살을 계속했고, 돌아가는 그 날까지도 학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문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라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러한 히데요시의 명령은 전장에서 조선인을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가 그의 관심사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장의 왜장들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고, 히데요시는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행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인과 방화와 강간은 왜군에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행위였고, 바로 이 같은 배경에서 자행된 조선판 킬링필드의 현장이 동래성이었으며, 왜군의 이러한 만행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저런 저런 개, 소, 말, 돼지 같은 놈들, 아주 썩을 넘들, 오살할 놈들이여 눈감으면 코베어 간단 말이 저때 부터 유래 되었다하니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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