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57> 선조 5 - 예고된 침략(2)

이찬조 2021. 4. 13. 21:02

<조선왕조실록(57> 선조 5 - 예고된 침략(2)

조선 통신사의 일본 내 활동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실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 ‘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당당하게 일본의 무례를 꾸짖은 반면, 황윤길은 재물확보에 급급해 비루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김성일이 유성룡과 같은 동인인데다, 전쟁발발에 대해 헛다리를 짚는 걸 보면, 유성룡의 김성일에 대한 후한 평가는 자기 붕당에 대한 자화자찬에 불과한 것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김성일은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워낙 세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정세파악을 그르치고 조정에 사실상 허위보고를 하고 마는 크나큰 우를 범합니다.

조선에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눈빛이 빛나고 지략이 풍부해보였으며, 여러 사정을 볼 때 머지않아 조선을 칠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쥐같이 생긴 인물로서 두려워할 바 못되고, 조선을 칠 의사와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난상토론 끝에 결국은 "전쟁은 그렇게 쉽게 나는 것이 아니다,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겠지 설마 전면전을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보다 마음 편한 선택인 김성일의 의견을 믿는 것으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일단 발생하면 어마어마한 인명이 죽고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속성을 가진 “전쟁”이 과연 실제로 발발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면밀한 과학적 분석과 전략적 탐색이 아닌 토론으로 결론 내리는 이 신기한 문화...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조정은 이순신, 송상헌 등을 남쪽 최전방에 배치하고, 전국에 축성, 성곽보수 등을 명했으나, 이마저도 김성일은 민심이반을 걱정하며 반대하였습니다.

조선은 유학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 문신의 나라였고(권력은 붓끝에서 나온다!), 이들이 병조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해 무신들을 부리고 다스렸으며, 이렇다 할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되면서 그나마 조선 초에 있던 진법훈련이니 병기개량이니 하는 것들 마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말을 듣는 장수가 여진족 몇을 베게 되면 이를 과장해 명장이라 치켜세워 승진을 시켰고, 장수는 장수대로 인사권을 쥔 문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축재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군졸들은 아무 빽도 없고 도망갈 배짱도 없는 약자 중의 약자들로서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습니다.

위와 같은 삼위일체 체제에, 왕 같지도 않은 왕에, 거기다가 전쟁은 없다는 동인정권의 결정적 오판까지 겹쳤으니, 이 나라가 어찌 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진년 봄, 왜인들이 머무르는 왜관은 이미 텅 빈지 오래였고,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이 홀로 거북선을 타고 포격훈련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선은 조용했고, 예고된 전쟁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